[스크랩]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의 비교 감상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작곡가인 모리스 라벨(1875~1937)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 명문가 출신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곡으로 빈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독주로 초연됐습니다.
라벨은 단일악장의 형식으로 재즈의 효과를 도입해서 이 곡을 작곡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이 곡이 왼손만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토로했으나 라벨은 그에게 한 음표라도 변경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의 작품에 압도되지 않았다. 나는 짐짓 감탄한 척하는 성질이 아니었으므로 라벨은 아마 실망했을 것이다.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여러 달 동안 연습한 후에 비로소 나는 이 곡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가를 이해했다."
1. 블라도 페를레뮈테르/파리 콜론 콘서트 오케스트라/야샤 호렌슈타인(VOX)
1955년의 모노럴 레코딩으로 녹음장소는 기재돼 있지 않으며 총연주시간은 18분 18초입니다.
블라도 페를레뮈테르(1904~2002)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로서 라벨의 제자였었기 때문에 라벨의 작품 해석에는 독보적인 사람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지만 숨겨진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관현악은 베로프반의 런던 심포니의 기량에 미치지 못하지만 관능적이고 신비적인 곡상을 묘사하는 피아노 독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녹음도 관현악에 비해 독주 피아노를 강조하여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모노럴 레코딩이지만 디테일이 잘 살아 있고 곡상의 감성을 잘 살린 섬세하고 치밀한 피아노 독주는 관현악의 뒤떨어지는 기량을 상쇄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2. 미셸 베로프/런던 심포니/클라우디오 아바도(DG)
1987년 11월, 런던에서의 디지탈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7분 27초입니다.
곡이 지닌 신비주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잘 살렸으며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답게 프랑스적인 정서를 잘 살려 연주하고 있습니다.
곡은 중반부에 활기찬 행진곡풍의 분위기로 반전되는데 아바도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의 치밀하고 몽환적인 색채를 충실히 표현한 관현악이 베로프의 피아노 독주를 잘 받쳐 주면서 곡은 쾌활한 분위기로 끝을 맺습니다.
프랑스적인 간드러진 분위기를 잘 살려 놓았는데 그 관능적인 색채미와 미국에서 건너 온 재즈의 영향을 섬세하면서도 외향적인 장쾌한 연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샹송 프랑소와/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앙드레 클뤼탕스(EMI GROC)
1959년 8월 1일부터 3일까지, 파리에서의 스테레오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8분 25초입니다.
쇼팽과 드뷔시, 라벨에 정통했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요절한 비운의 피아니스트인 프랑소와의 예술혼의 정수가 배어 있는 연주입니다.
프랑스적인 감수성을 덤덤하게 잘 살려 놓은 연주이지만 극적인 표현이 미흡하고 긴장감을 느끼게하기보다는 한여름철의 이완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연주입니다.
곡의 활기와 다이나믹이 충분히 살려져 있지 않고 평온하게 순류를 타고 흘러가는 듯한 연주입니다.
상상력의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틴족의 소시민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곡의 라틴적인 색채를 평이하게 풀어 놓았습니다.
4. 로베르 카자드쉬/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유진 올만디(CBS-SONY)
1947년 1월 22일, 필라델피아에서의 모노럴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7분 2초입니다.
모차르트와 라벨에 능했었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답게 확신에 찬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모노럴 레코딩이라는 단점이 이 곡의 쾌활하고 화려한 색채미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베로프에 비해서는 남성적이고 징쾌한 연주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프랑스적인 색채보다는 미국적인 색채가 더 강하게 표현됐다고 생각됩니다.
비교적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연주인데 장중한 관현악보다는 독주 피아노의 섬세하고 치밀한 타건이 훨씬 더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프랑스적인 관능미를 잘 살린 카자드쉬의 피아노 독주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데 관현악은 피아노 독주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5. 파울 비트겐슈타인/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브루노 발터(DESIGNO)
1937년의 모노럴 레코딩으로 녹음장소는 음반에 기재돼 있지 않으며 총연주시간은 15분 53초입니다.
이 곡을 작곡가에게 의뢰하고 초연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해석을 접할 수 있는 역사적인 레코딩입니다.
비록 초연은 아니지만 왼손으로밖에 연주할 수 없었던 장애를 딛고 왼손 피아니스트로서 대성한 집념의 인간승리를 보여주는 진중한 연주입니다.
잡음은 리마스터링에 의해 많이 제거됐지만 SP 녹음의 답답한 음질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라벨이 죽은 해에 녹음된 연주로서 작곡 의뢰를 통해 라벨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한 장애인 피아니스트의 눈물겨운 뜨거운 열정의 예술혼이 여실히 느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사색적이고 내성적인 연주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6. 베르너 하스/몬테 카를로 국립 가극장 관현악단/알체오 갈리에라(PHILIPS)
1968년 11월과 12월, 모나코에서의 스테레오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7분 41초입니다.
곡의 서정적인 면을 잘 살려서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주입니다.
그러나 이 곡의 톡 쏘는 듯한 해학적인 맛은 미흡하고 피아노 독주는 관현악 속에 융화되어 협주곡이라기보다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대립과 협조라는 상충되는 요소를 가진 협주곡의 묘미가 반감되어 들립니다.
개성적이고 신랄한 피아노 독주가 아쉬운 연주입니다.
또한 한 편의 서정시를 서사시로 바꿔 놓은 듯한 연주입니다.
7. 크리스티안 치메르만/런던 심포니/피에르 불레즈(DG)
1996년 7월, 와트포드(Watford)에서의 디지탈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8분 6초입니다.
치메르만의 기교가 돋보이는 타건이 인상적이고 불레즈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지만 관능적인 색채미의 표현은 부족합니다.
명확한 해석이 뒤따라주지 않는 기교는 모래 위에 지은 성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연주입니다.
녹음도 훌륭하지만 무엇을 들려주는 것인지 모호하게 받아들여지는 연주입니다.
8. 백건우/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게리 베르티니(ORFEO)
1981년 11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의 디지탈 레코딩으로 총연주시간은 19분 58초입니다.
비교 감상 대상 연주중 가장 느린 연주로서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일면이 있고 결정적으로 관현악단을 잘못 선택하여 곡의 라틴적이고 경쾌하고 발랄한 색채를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내성적인 분위기의 연주로 라벨의 곡상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감성 부족의 무뚝뚝한 연주입니다.
주의깊게 듣거나 흘려서 듣거나 라벨의 관능적이고 현란한 색채미가 충분히 느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