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道德經 第 八 上善若水
道德經이 2500여년 전에 쓰여진 것이니, 지금 그 당시 老子의 뜻을 정확히 把握하여 노자 5000자 한 자 한 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이렇다'고 斷定하여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무도 오랜 시간의 隔差와 風習 및 思考의 變化로 애초에 노자가 의도한대로의 의미가 이 시대의 사람에게 제대로 이해되는 것도 至難할 것이다. 더군다나 일단 筆者의 펜을 떠난 글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의 틀에 따라 저마다의 것으로 다르게 수용될 수 있음도 고려되어야 한다. 難解한 詩가 시인의 뜻과 전혀 다르게 어떤 독자의 心琴을 울렸다면 그대로의 意味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本來의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간을 달리해서 글을 쓴 필자의 입장에서도 꼭이 같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道德經을 읽겠다고 책을 잡고 앉은 한문의 初心者로서 "上善若水" 章에 대한 여러 주석의 차이가 제대로된 이해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각각의 주석을 그 나름대로 수용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 어렴풋이나마 부족한대로의 노자읽기로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 나의 독해력이 향상되고 안목이 달라질 때 또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임에 이 章에 대한 내 이해를 유보하며 완벽한 이해를 보류함도 크게 흠이 되지 않을 터이다.
첫 번째 주해는 동국대 사회교육원과정의 이연교수 강의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물론 나의 잘못된 이해로 이연선생님의 의도를 다르게 옮긴 것이 있을 수 있다. 같이 공부한 학형들의 바로 잡아주시기 바란다.
(老子를 佛교的 觀點에서 註釋을 단 宋나라 때의 白玉蟾이 쓴 "道德寶章" 교재에 의거)
上善若水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며 다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水의 德用이)머무름에는 땅을 이롭게 하고, 물은 인간의 마음을 깊고 그윽하게 한다, 더불어 함에는 인으로써 하고, 말은 신의로써 하고, 바름(질서)으로서 잘 다스리고, 일을 함에는 적절히 유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적절한 때에 응하고,
夫惟不爭 故無尤矣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니 고로 허물이 없음이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가 대화식으로 역은 책 " 노자이야기"주석이다.
上善若水.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사는 데는 땅이 좋다. 마음은 깊은 것이 좋다. 벗을 사귐에는 어진 것이 좋다. 말은 성실한 것이 좋다. 정치는 자연의 도리로써 다스리는 게 좋다. 일은 잘 할 줄 아는 데 좋다. 움직임은 때를 맞추는 게 좋다.
夫惟不爭 故無尤
대저, 오직 다투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탓할 바가 없다.
『노자을 웃긴 남자 1,2』를 출판하여 도올의 '노자강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여류 벽운 이경숙의 주석이다.
上善若水.
上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왜냐하면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할 수 있느니라.
'處衆人之所惡' 에 대한 주석이 다른 두 주해와 다르다.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나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라고 해석하려면 "處衆人之惡所" 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땅을 살피는 머무름의 선이 있고, 깊고 조용하게 두는 마음의 선이 있고, 仁이라는 사람을 대할 때의 선이 있고, 믿음이라는 말할 때의 선이 있고, 치라는 나라 다스림의 선이 있고, 능력이라는 일할 때의 선이 있고, 때라는 움직일 때의 선이 있지만
夫惟不爭 故無尤
대저 오로지 중요한 것은 몰과 같이 다투지 않는 것이니 그리해야 허물이 없느니라.
上先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까지는 세 주해가 크게 다름이 없다. 다음 處衆人之所惡에서 이경숙씨만 「處,衆人之所惡」로 띄어 읽어서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한다'. 고 새기고 있다.
故幾於道, 이연선생은 왕필의 주석 "道無水有 故曰幾也"를 설명하신다. 水=有→ 물리적 사실,道=無 →관념적 체계 이므로 도에 가깝다고 했다며 탁월한 주석이라고 한다.
다음 "居善地"이하에서 각 주해가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연선생은 善의 字意를 품사적 용법으로 다양하게 설명하면서 水의 德用 八」로 접근하셨는데, 물론 다른 두 주해에서 각 절에 대한 해석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상, 논리의 흐름이라는 맥락으로는 가장 적절한 해석 방법으로 받아들여진다. 水의 德用을 설명해 나가는 중에 현담선생이 居,心,與字를 동사의 명사형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의견을 내었을 때, 전체적인 이 章에 대한 해석의 흐름이 무난하지 않은가 하고 공감하였다.
水有八善이라는 물의 德目에 입각하여 각 항목을 이연선생님의 해설에 기본하여 이해된 대로 정리를 하면
居善地: 땅에 스미어 모든 지상의 생명을 생존할 수 있게하는 작용을 하니 어찌 땅을 잘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心善淵: 물의 흐름이 작은 沼가 되고 아름다운 潭을 만들고 나아가 깊은 호수를 이루고 대양의 深海을 이루니 어찌 선연이 아닐까?
與善仁: 강과 바다에 그 많은 생명을 부양하니 하여 나누어 줌에 부족이 없으니 더불어 함에 어찌 善仁이 아닌가
言善信: 졸졸 흐르는 시내로부터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 그리고 대양의 파도의 굉음에서 물의 언어의 信을 느낄 수 있다.
正善治: 水流是爲法이라 法則若水去 하여 法=水+去 .또한 물은 수평을 재는 도구다. 하여 바른 나눔이니 어찌 잘 다스리는 것의 모범이 아닐까
事善能: 온 누리를 적시며 생명을 존속하게 하니 善能이라 할 수 있다.
動善時: 適時, 恒時, 成功則得時라. 곡식이 자라고 초목이 목마를 때 스미어 목마름을 채워주고 한 겨울에는 눈 되어 산하를 덮어 주며 멈추어 있으니 어찌 움직임에 때를 아는 것이 이보다 더 지혜로울까
이현주 목사의 주해나 이경숙씩의 주해는 "故幾於道" 이하의 句에서 갑자기 문장의 흐름이 끊기는, 논리의 전개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실제 이현주 목사의 "노자 이야기"가 각 句에 대한 주해에서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문장흐름의 논리에서 아무래도 수긍이 되지 않는 점이 있고, 이경숙씨의 새로운 해석방법에도 공감이 가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여 도에 가깝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문을 이해하는 아주 초보의 입장에서 이 장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 어쭙잖고 만용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름대로 하루 공부한 내용을 복습해 보는 것이 그져 답답하고 모르는 채 지나쳐 버리는 것보다는 뒷 날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감히 오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배움이 깊은 동이서원 학형들의 조언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