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농자료

귀농의 길

後凋1 2010. 6. 22. 12:34

귀농의 길’ 연재를 시작하며.
(김용전/새우골산방)
 
고추밭 만드는 중. 멀리 보이는 간판을 줌인 해서 읽어보면 '평화의 댐 34km, 화천 18km'라고 씌여 있다. 그야말로 몇 발짝 더 가면 북한이다. 전쟁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동네 사람들은 포탄은 우리 머리위로만 날아 다닐거라고 농담한다. 노란 꽃은 개불알꽃.
www.naturei.net 2009-01-16 [ ]


귀농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십년 가까이 되어 간다. 동촌리에 정착한 지는 4년 째,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외지인들이 송이 밭을 다 망친다’식의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하는 걸로 봐서 이제 ‘진짜 동네 사람' 다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기는 해도 ’김 선생은 동네 사람이라 믿고 이야기 하는 거니까 오해마슈!‘라고 단서를 달았었으니까.

얼마 전 춘천 E 마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내가 돼지고기를 산다고 매장 앞에 가서 섰는데 평창에서 나오는 무슨 ‘한방 웰빙 돼지고기’가 있어서 그걸 사려고 하다가 바로 옆에 놓여 있는 ‘화천 자시라 포크’를 보더니 주춤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화천 사람이 화천 거 사야지, 어떡해?’라며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닌가? ‘그걸 왜 물어? 당근이지.’ 결국 잣을 먹여서 키운 화천 자시라 포크를 샀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아내도 화천 사람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화천은 아직까지도 시장 상황이 열악하다. 시장엘 가보면 어딘지 쓸쓸함을 느끼는 건 나만의 생각인지....어쨌든 서울엘 다녀오다 춘천쯤에서 점심때가 되어도 배고픈 걸 참고 화천 행 버스에 그냥 오른다. 국밥 한 그릇이라도 화천 읍내에서 사먹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고향 아닌 타향 어느 한 곳의 동네 사람 되기까지 십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아직도 가야할 귀농의 길은 멀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 길은 어떻게 가야하나의 문제이지, 어디로 가야하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각설, 블로그를 만들어 놓고 남들처럼 글을 올리자니, 게으른데다가 농사일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어서 ‘역부족’이라는 진짜 이유는 꽁꽁 숨겨 놓고 차일피일 생각만 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동안의 실적을 점검해 보니 3월 16일 블로그 실질 오픈 이후 새로 만들어 올린 글은 세 편 - 보름에 한 편 꼴이다. 너무 했다. 아무리 농사일 바쁘고 원고 쓰기에 바쁘다고 해도.

결국 생각 끝에, ‘어려운 세상사 꼬집으려 애쓰지 말고 쉬운 걸로 쓰자’, 이렇게 방향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결국 내가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걸어온 귀농의 길 뿐이다. 귀농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잘했든 못했든 제 발로 걸어온 길이니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야 어려울 게 없지 않겠는가? 하여 오늘부터 ‘귀농의 길’을 연재한다. 좀 두서없을 지도 모른다. 일하다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아지면 인터벌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바람이 있다면 귀농한 사람이 읽고 ‘그걸 귀농이라고 이야기 하냐?’라는 것보다, 귀농하려는 사람이 읽고 ‘이렇게 가는 길도 있구나!’라고 느껴 주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이 읽고 ‘재미있는데, 나도 귀농이나 해볼까?’라고 느껴주면 더욱 좋다. 내가 귀농 전도사라서가 아니라 글쟁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쟁이들은, 단 한 사람의 독자일지라도 지 글 읽고 손뼉 치며 재미있어 하거나, 공감해서 짠해 하는 모습을 보면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귀농의 길 1 - 출발점

(김용전/새우골산방)
 
월 5일 로타리를 쳤다. 15톤 트럭으로 한 차에 30만원 하는 두엄을 사서 손수레로 밭에 골고루 펴두면 영현 아우가 와서 로타리를 쳐준다. 비용은 따로 주지 않고 우리 부부가 다음날 가서 감자심기를 품앗이로 했다. 동촌리는 봄이 늦어서 4월인데도 모든 게 썰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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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귀농’이라고 하면 ‘귀농, 그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라는 말을 떠 올린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 자발적으로 귀농의 길로 나선 것은 아니다. 시이소의 한쪽이 내려가면 반대편은 올라가듯이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허무로 얼룩지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다른 삶이 생각났고 그것을 찾아 나선 길이 귀농으로 이어진 것이다.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나는 창업한 대학선배의 권유를 받고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기업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라는 신념에서였다. 데려간 오너도 뜻이 그랬다. 제대로 된 교육을 세상에 펼치자.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월급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회사를 키운다는 일념으로 즐겁게 그리고 치열하게 일했다. 서른아홉에 이사가 되었고 연구실장, 연수실장, 영업본부장, 기획홍보담당, 해외지사장, 인사노무 담당 등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일했다. 회사는 창업 20여년 만에 매출 3천억이 되었고 계열사 13개를 거느린 소위 그룹이 되었다. 선배 오너는 당연히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왠일일까? IMF 2년 동안 급여가 동결되면서 노사분규가 터졌고 회사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는 타결, 임단협안에는 우리사주조합을 만들기로 합의가 되었다. 담당 임원인 나는 당연지사로 우리사주조합을 추진했다. 위에서 몇 번의 경고가 들어왔다. 급하니까 약속은 했지만 실은 주식을 나누기 싫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상생을 위해서는 종업원지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꿋꿋이 밀고 나갔다. 그것이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갑자기 고대 최고경영자 과정 연수를 받으라고 명령이 났다. ‘큰일을 하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런 줄 알고 열심히 공부했다. 1년이 지나가고 과정을 수료했다. 이번에는 예상과 달리 연수원 교수로 가라는 명이 나왔다. 본사는 퇴직을 하고 프리랜서 교수로 가서 알고 있는 노하우를 모두 전수해 달라는 말과 함께. 어디에 가서 일하면 어떠랴? 기꺼이 갔다. 그러나 교수 부임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그제서야 내가 철저하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라면 강의가 배정되어야 하는데 아예 강의를 배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임교육이나 몇 시간 그 외에는 없었다. 그러니 노하우를 전수할 일도 없고 강의가 없으니 강사료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창피함이었다. 연수원 교수라고 붙어 있으면서 강의도 제대로 없는 비참한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이려니 죽기보다 싫었다. 이미 최고경영자 과정 보낼 때부터 시작된 ‘토사구팽’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깨끗이 물러났다. 당시 심정은 조용필의 노래 가사처럼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였다. 그렇게도 어리석었던 자신이 너무 싫었다.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일했던 것도 불찰이요, 교육기업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불찰이요, 선배를 교육가라고 생각했던 것도 불찰이요, 하라는 대로 줄줄 따라서 연수원 교수까지 내몰린 것도 불찰이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사람을 믿었던 내 불찰이었다. 이십여 년을 그렇게 어리석게 살았다니....지금 돌이켜 보아도 난 참 바보처럼 살았었다. 오너는 왜 그렇게 사람을 비참한 꼴로 내던져야 했을까? 이미 돈을 벌어버린 그는 사람이 변해버렸고 나누자는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창업 공신인데 다만 한 잔의 쓴 소주에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덧붙여서 모양새 있게 내보내주면 안 된단 말인가? 만약 그랬다면 지금 동촌리에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지금도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리라. 그야말로 오라는 곳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결과는 그랬다. 사람이 싫고 조직이 싫고 충성이니 애사심이니 인간중시니 하는 말들이 다 싫어져버렸다.

귀농을 요새는 ‘귀본(歸本)’이라고도 하는 걸 들었다.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일 텐데 귀농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지는 너무 거창해서 알 수 없으나 당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귀본이었다.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 온 곳 - 즉 학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사 자리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나이가 50, 정상적인 교직은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대안학교 교사’였다. 여기저기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전화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자연 생태를 이해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 때 알려준 것이 바로 귀농학교였다. 그곳에 가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체 없이 찾아가서 등록했다. 서울귀농학교 20기 - 그것이 귀농의 길로 들어선 출발점이었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농사를 통해서 돈을 벌어야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더더구나 농촌을 살리자는 식의 사명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한 시이소 처럼, 배신의 충격이 기존의 삶을 버리고 다른 삶으로 뛰어들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간 귀농학교였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귀농의 길 2 - 귀농학교와 아내

(김용전/새우골산방)
 
동촌리 청년회원들이 파로호 주변 유채밭 조성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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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한 기수에 50명이었는데 20대 아가씨부터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 그리고 귀농학교를 두 번째 다니는 사람 - 각오가 약해진다며 - 등등 정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개강식 때 이병철 본부장이 ‘자신이 주인 되는 삶을 살자’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는데 느끼는 바가 많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했건만 그 결과라고 하는 것은 조기 퇴출, 전혀 내가 주인이 아니었던 삶 - 그것이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출세를 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언제고 남이 내 인생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삶,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삶 -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귀농학교는 농사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정신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물론 한 달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이즘을 맛보는 그런 곳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귀농할 것인가 보다 왜 귀농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태계 오염의 문제, 죽어가는 땅에 대한 문제 등이 많이 거론되었고 농사는 100프로 친환경 농사에 대한 것만 다루었다.

수강생들은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젖어서 당시 막걸리를 마실 때 건배 구호는 으레 ‘지구를 살리자!’였다. 언감생심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지구를 살리는 방향으로 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 기분은 무슨 개척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내도 같이 귀농학교 20기를 수료했는데 신기한 것은 아내가 더 재미있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많은 귀농희망자들이 연락을 하고 찾아오고 하는데 대부분 공통되는 것이 남편은 귀농을 바라고, 아내는 도시생활을 바라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아내에 대한 설득’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아내와 함께 길을 찾으라고. 남자가 먼저 알아보고, 가보고, 살아보고 나서야 아내에게 입증을 하려고 하는데 이는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어차피 각자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여자들이 느끼고 예민하게 점검하는 것은 여자의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판단을 아무리 잘 해도 나중에 합류한 여자가 직접 부딪쳐 보면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려워진다. 아내도 아내 나름대로의 귀농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 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설령 나중에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쳐도 그 선택은 본인이 한 것이기 때문에 남 탓을 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당신말만 듣고 왔는데 이게 뭐야?’라든지 ‘당신 이야기하고 다르잖아?’라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렇게 될까봐 어려움이 있을 때 남자가 혼자 그 문제를 떠안고 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하나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의 재미와 ‘부부가 터놓고 함께하는 삶’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귀농의 길은 가급적 처음부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부부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농은 생각이나 소문처럼, 또는 남들의 말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삶이'은 결코 아니다. 아니 아름다운 삶이 될 수는 있지만 한 달음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삶'이라는 표현은 그 종착점보다도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들은 정작 귀농의 길로 나서놓고도 아내에게 만큼은 도시 생활과 같은 온갖 편리한 것을 갖춘 일상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그래서는 어딘지 절름발이 귀농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귀농의 길 3 - 귀농과 거농의 차이

양수리의 밤은 깊어 (김용전/새우골산방)
 
비 갠 뒤 파로호의 모습. 신령스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저 멀리 보이는 호수 끝자락에 동촌리가 있다. 이 사진은 구만리 쪽에서 찍었다.


www.naturei.net 2009-01-16 [ ]


귀농학교 한 달 째 되던 날일까? 드디어 양수리로 첫 귀농 실습을 나갔다. 양수리는 팔당댐 때문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쓸 수 없는 유기농 전용 지역이라 정농회 회원들이 많았다. 가던 날도 정농회 부회장이라는 분이 강의를 해 주셨다. 그런데 강의를 하러 2층으로 올라오던 그 사람이 무심결에 ‘시골도 살기 어려운데 왜들 이렇게 도시에서 시골로 몰려들 오나?’하고 푸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진심인 것 같았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각자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주제는 ‘귀농하려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희한하게도 거의 모두가 공통된 의견이 ‘자녀 교육’이었다. 즉 아이들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이었다.

그런데 김태오라는 분이 전혀 정반대의 의견을 이야기해서 눈길을 끌었다. 자신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귀농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각박한 도시에서 ‘공부하는 기계’로 아이들을 키우기 싫어서 귀농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 공부가 끝나 버려서 해당이 없는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저녁을 먹고 으레 그렇듯 뒤풀이가 마을 회관에서 벌어졌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낮에 자녀교육에 대해 소신 발언을 했던 김태오씨와 어쩌다 논쟁이 붙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던 그가 문득 정색을 하면서 “선생님 같은 분이 왜 귀농을 한다고 이런 데서 왔다 갔다 합니까?” 라는 게 아닌가? 언뜻 듣기에 방황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또 물을 흐린다는 말 같기도 하고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해서 나도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뭘 왔다 갔다 한다는 거요? 나도 귀농하러 온 사람인데.” 그러자 그의 답이 “아 선생님처럼 애들 다 키웠지, 회사에서 임원까지 지냈지, 강남에 아파트 까지 있는 사람이 무슨 귀농입니까? 거농이지, 거농!” 이라는 거다. ‘귀농은 농사를 짓는 것, 거농은 농촌에 살기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는 지지 않았다. “나도 농사지으려고 하는 거요. 어디 젊은 사람만 농사지으라는 법이 있소?” 그러자 그도 지지 않았다. “에이 농사를 지어도 텃밭이겠지요. 먹고 살만한 양반이 무슨 힘들게 농사를 짓겠어요? 속셈은 전원 생활하러 가시는 거지. 그걸 우리는 가라귀농이라 부릅니다. 가라 귀농!”

가라 귀농이라!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던 터라 논쟁이 좀 격하고 길어졌는데 젊은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서 ‘나이 든 분이 양보 하시지요’하는 바람에 일단 중도이폐 했다. 그리고는 분위기를 바꾼다고 노래들을 불렀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밝았다.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니 격세지감이 있다. 당시에는 ‘귀농’을 굉장히 신성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에 목숨 걸지 않는 귀농은 사이비 취급을 했던 그런 시절이다. 그래서 귀농학교 동기나 선후배들도 ‘동지’라는 말을 쓰곤 했다. 여기 화천군 용호리에 말 그대로 ‘귀농 동지’ 백승우 씨가 있는데 그는 나보다 엄청 선배다. 귀농학교 6기니까. 그리고 엄청 고위직이다. 귀농본부 이사니까. 그리고 엄청 도사다. 정토 불교회에서 도 닦는 수행자니까. 그렇지만 이거저거 다 뭉개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형님 행세를 한다. 그 아우 말에 의하면 귀농에 대한 인식이 그랬던 시절도 있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한다. 그의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농촌에는 농사꾼만 필요한 게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장돌뱅이, 언챙이, 째보 다 필요하단다. 꼭 농사짓는 사람만 우대할 것이 아니라 무슨 재주든 지닌 사람들이 농촌으로 모여 들어서 각자의 재주를 농촌을 위해서 발휘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아우의 말을 들어보면 ‘귀농을 너무 고상하게, 또 정직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산골에 가서 도사처럼 유기농 짓고 속세를 멀리 하면서 고고하게 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귀농이 아니라는 것이다. 땅을 마련해도 장래를 내다보면서 하고, 농사를 지어도 수입을 계산하면서 하고, 경쟁 사회를 헤쳐 나가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농학교의 커리큘럼 중에 땅값 오를 전망 있는 ‘땅 고르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어쨌든 그 때 당시에는 나도 이십년 직장 생활에서 겪은 오너의 비겁한 배신에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척점에서 귀농을 ‘오로지 아름답고 정직하고 신성한 것’으로만 가치 부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태오 씨의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자존심 상해서 격론을 벌였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요, 그래도 그 때 그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 이 동촌리에 정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이 비록 멀고 높아서 아득하다 해도, 결국 그런 아름다운 이상을 품고 가는 자가 힘든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본다. 너무 현실적으로만 귀농을 생각하는 것도 또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 - 너무나 관용적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귀농 성공의 길이다.

 

귀농의 길 4 - 귀농과 고향

고향은 아늑한 엄마의 품이련가 (김용전/새우골산방)
 
동촌리 새말 설경
www.naturei.net 2009-03-26 [ ]

한옥 집 강의 시간에 나온 강사가 마이크를 잡더니 느닷없이 “사회 낙오병들 여기 다 모였구만! 일 잘 되고, 돈 잘 벌려봐! 왜 시골로 가려고 하겠어? 뭔가 도시에서 일이 안 풀리니까 귀농 타령 하는 거지!” 라고 일갈을 해서 가슴이 뜨끔했다.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으면 나도 과연 자발적으로 귀농을 택했을까 순간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강사가 그래 놓고는 “자, 자! 농담이고,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 없겠지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귀농해야 되요.” 라고 마무리를 하는데 옆 사람들을 둘러보니 모두 표정이 나와 비슷했다.

귀농학교 두 달째 되는 날, 충남 홍성으로 두 번째 귀농 실습을 나갔다. 주형로 목사가 오리 농법을 창안 실시해서 거의 모든 농가가 참여하고 있는 친환경 논농사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만큼 귀농자들도 꽤 많은 곳이었다. 먼저 귀농한 선배가 정신교육을 했는데 어찌나 강하게 하는 지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그 선배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대충 아름다운 시골 생활 꿈꾸면서 귀농할 거면 아예 때려 치워라!” 였다. 한 마디로 ‘귀농은 아무나 하나?’였다. 듣는 나는 그냥 무심이었다. 글쎄, 어떤 사람들이 귀농을 그리 쉽게 생각해서 실패 하길래 저 선배가 저렇게 목청을 높이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진지하다면 무어 그리 어려울라고?

다음 날 실습은 유기농 생강을 재배하는 김기영 씨 댁으로 나갔다. 주일 미사를 가야 하는 천주교 신자끼리 한 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주인을 따라 홍성 성당엘 나갔는데 마침 그 날이 성모승천기념대축일이라 성당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떡에 밥에 게다가 막걸리까지 실컷 먹느라 오전을 편안히 보냈다. 오후에 두엄 내는 일을 도왔다.

일이 끝나고 난 뒤 김기영 씨가 자신의 귀농 여정을 잠깐 이야기 해 주는데 원래 김천이 고향이라 고향으로 내려갔더란다. 그런데 주변에서 친척들과 친구들이 어찌나 수군대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다시 길을 떠난 게 홍성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급적 귀농지는 고향을 택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나는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도 진지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왕이면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 있는 고향이 좋지 않은가. 지금 돌이켜 보면 결국 나도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동촌리에 정착했는데 고향은 귀농지로서 ‘아늑한 엄마의 품’만은 아닌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완전히 인생 후반을 유유자적하면서 은퇴자로 지낼 심산이라면 모르되 무언가 일을 더 해야 하는 귀농자의 입장은 아예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각오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예수도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은 목수 요셉의 아들 아닌가?’였다. 물론 귀농자들이 무슨 예수님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어쨌든 예전의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각오로 어떤 일을 벌여도 왜곡되거나 쓸 데 없는 말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도 시골이라는 지역사회는 그 곳 출신 - 토박이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사회다. 특히 지역 고등학교 출신 선후배 사이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은 외지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곳에서도 공무원을 하는 한 후배가 고등학교를 춘천으로 진학했던 걸 후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성적이 좋아서 춘천으로 유학(?)을 갔는데 정작 대학 졸업 후 돌아온 고향은 지역 고등학교 선후배 인맥이 너무 강해서 자신은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이야 무슨 소용이랴? 내 먹을 농사 잘 되면 그만이고 내 실력대로 글 잘 쓰면 그만인 것을. 학교 선후배가 아니라 인간성을 보고 마음으로 우러나서 부르는 ‘형님’소리가 나는 가장 듣기 좋다.

 

귀농의 길 5 - 답사의 발길

(김용전/새우골산방)
 
필자의 집 뒷쪽으로 보이는 동촌리 전경.산에는 구름이 안개처럼 걸렸다. 밭에 벼처럼 보이는 것은 동촌리 특산품인 달래다.야생 달래를 집에서 조금식 재배하다가 지금처럼 밭작물로 농사짓기에 이르렀다.
www.naturei.net 2009-03-26 [ ]

귀농학교를 졸업한 사람 가운데 10%만이 진짜 귀농을 단행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귀농은 시대의 화두이면서도 동시에 어렵기도 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3개월의 귀농학교 과정을 마치고 나자 다음은 실제로 ‘어디로 갈거나?’가 대두되었다. 그래서 귀농본부 복덕방에도 열심히 드나들고, 동기들과 교류를 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던 가운데 맨 먼저 발품을 판 곳이 충남 서산이었다.

가본 곳은 ‘철새 우는 마을’이라는 농장이었는데 김정규 씨라는 분이 7천여평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 분이 귀농복덕방에 ‘같이 일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올려 놓았길래 전화를 한 뒤 방문해서 1박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곳은 인연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우선 이 분의 꿈이 풀무원과 같은 식품 회사를 차려서 유통업계에 한번 이름을 날려 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품은 유기농 농산물이었다. 특히 서산의 굴을 이용한 ‘굴밥 도시락’을 한 번 성공시켜 보겠다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사업을 벌인다면 그야말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엄청 많을 것 같았다. 재능교육이라는 교육기업을 창업해서 그룹으로 까지 키우는 데 창업주와 더불어 혼신의 힘을 기울였었기 때문에 재무 회계를 뺀 나머지 분야에서는 어떤 것이든 자신 있었다.

그러나 왜 귀농의 길로 나섰던가? 그 열정의 끝에 회사가 성공하자 사람이 달라져 버린 창업주가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서 퇴출시키는 데 골몰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나선 길이 아닌가? 그런데 다시 사업을 하는 길로 나선다? 아무래도 마음이 와 닿지 않았다. 물론 사람이 다 성공하면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사업’이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가라앉아 버렸다. 두 번의 방문을 끝으로 서산행은 접고 말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문경이었다. 아내가 잘 아는 사람이 그 곳에 사과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이곳도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사과나무들은 잘 키워져 있었으나 읍내와 너무 가깝고 앞뒤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당시까지만 해도 ‘귀농’하면 어딘지 호젓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고 있던 마음에 얼른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문경엔 마침 동기생 이현섭 씨가 있던 터라 평소 내왕은 없었지만 전화로 문의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의외로 사과밭은 관리하기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초보자가 섣불리 손댈 일이 아니라고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 번 좋은 귀농지를 추천할 테니 와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문경의 사과밭은 파의가 되고 말았다.

 

귀농의 길 6 - 삶이냐 투자냐
쌍용 계곡의 땅 (김용전/새우골산방)
 
새우골 입구에 서울 사람이 땅을 사서 집짓는다고 포클레인으로 터를 닦고 있다. 뒤로 보이는 낙엽송 숲이 브래드 피트의 '가을의 전설'에 나오는 아이오와의 숲을 연상케 해주어서 좋았는데....그림이 조금은 버리게 생겼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 동촌리?/font>
www.naturei.net 2009-03-26 [ ]

이 현섭 씨가 소개한 땅은 쌍용 계곡의 입구에 있는 2500평 규모였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원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숙박업소와 식당이 몇 개 자리하고 있었다. 쌍용 계곡은 청주 쪽 속리산 입구에서 문경 방향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계곡이다. 계곡이 크지 않으며 너무나 깊은 골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이 드나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농지가 거의 없었다. 추천받은 땅의 맞은편에는 5층짜리 모텔이 짓다가 만 상태로 서 있었다. 이래저래 첫 눈에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가격은 평당 10만원. 2억 5천이었다. 진짜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자 귀농의 길을 택한 건데 과연 여기가 합당한 것인가?

망설여지는 마음이 많았는데 이 현섭 씨의 설명에 끌려서 마음을 선뜻 정하기가 어려웠다. 설명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 석탄 산업이 하향세라 여러 가지 대안을 찾던 문경시가 관광 산업으로 눈을 돌렸고 그 첫 사업으로 쌍용 계곡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년만 지나면 땅값이 바로 두 배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1년 만에 두 배라.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동안 살 곳으로는 마땅치 않지만 당장 땅값이 그렇게 상승한다면 그 때 팔고 다시 찾아 나서면 될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땅을 사기로 하고 자금을 점검 해보니 2억은 되는데 5천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 투자자를 찾기로 하고 아는 사람을 찾아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현지를 보러 직접 다녀오더니 한 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렇게 형님 생각대로 땅값이 즉시 오르고 게다가 매수자가 바로 나타나겠는가?’였다.

첫째 땅값이 단기간에 두 배로 오른다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둘째는 두 배로 오른다면 5억인데 그 작은 골짜기를 보고 누가 선뜻 5억을 내고 땅을 사겠는가라는 설명이었다. 그리되면 결국 땅 투기하는 결과가 되어서 땅값이 오르고 매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세월을 기다리며 속을 끓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성경 말씀처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농사지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평화롭게 산다고 찾아 나선 귀농답사의 길이 어찌어찌 하더니 한 달음에 ‘땅으로 돈 벌려고 하는’ 욕망의 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좋게 말하면 귀농도 하고, 돈도 불리는 일석이조의 기회를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 잘못된 판단이었다. 우리는 미련 없이 쌍용 계곡을 포기했다.

귀농답사를 다니는 분들은 지금도 많으리라. 과연 어떤 곳이 좋은 곳인가 판단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답사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종합적으로 개인적 견해를 이야기하겠지만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투자 가치’를 제1로 생각하는 것은 귀농 답사에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투자 답사이지 귀농 답사가 아니다. 물론 귀농지를 고를 때 투자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것은 잘못이다. 경관 좋고 조용한 곳을 찾아간다고 너무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도로 나올 일이 생겼는데 땅이 팔리지 않아서 돈만 버린 사람들도 많다. 또 죽어라고 농사를 지어도 아이들 교육비 대랴, 생활비 하랴 재산이 불지 않는데, 땅을 잘 사서 지가 상승으로 재산 형성이 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귀농지로 다른 조건들을 살펴보되, 기왕이면 미래 투자 가치도 염두에 두는 것은 현명한 방책이다.

가까운 화천 용호리에 귀농한 백승우 아우 같은 이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그는 아예 귀농학교 교육과정에 ‘땅 고르는 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귀농자라고 해서 천하에 순진하게 ‘도 닦는 사람’처럼 미래 투자 가치를 전혀 도외시 하고 이념만 쫒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어쨌든 귀농 답사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요건을 살피되 우선순위를 잘 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도시에서 염량 빠르게 생활했던 과거가 있어서 ‘내년에 두 배로 오른다’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투자자를(투자자라는 말 자체가 귀농과는 거리가 멀다) 찾아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의 훌륭한(?) 의견을 듣고 나니 눈이 뜨여서 다시 본래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때 쌍용 계곡으로 귀농을 했으면 어땠을까? 결과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한편으로는 또 다른 마음에 드는 귀농지를 찾아다니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마라’ - 이것이 중요하다.

쌍용 계곡을 포기하고 나니 다시 ‘어디로 갈거나?’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귀농학교 동기생인 이선재 씨가 귀농지로 선택한 전남 곡성의 한 마을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귀농의 길 7

(김용전/새우골산방)
 
올 6월 초, 달님네 밭에 오이 하우스 만들러 갔다가 한 장 찰칵! 앞에 보이는 쇠 지렛대를 '뎃꾸'라고 부르는데 저 놈으로 땅에 구멍을 뚫은 뒤에 하우스 활대를 박아 넣는다. 건너편 소나무는 나이 300살이다
www.naturei.net 2009-03-26 [ ]

쌍용 계곡을 포기하고 난 뒤의 발길이 향한 곳은 전남 곡성의 한 마을이었다. 여기에 ‘한 마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마을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취락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아주 그림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25 가구 가옥들이 담장 하나로 올망졸망 붙어서 마을을 이루었는데 계곡 비탈에 들어선 집들이라 꼬불꼬불 계단을 이룬 골목길, 예전 모습 그대로인 흙집들, 집 뒤뜰에 울렁대는 대나무 숲....이런 모습들이 너무 정겨워서 마을에 사는 어떤 분이 마을 이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외부에 혹시 많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본래 모습이 훼손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아도 꼭 무슨 ‘지구촌 VJ’ 프로에 나오는 중국 오지 마을처럼 그렇게 비탈에 집들이 조르르 모여서 형성된 그런 마을이다. 이곳에 귀농 20기 동기생인 이선재 씨가 집을 마련해서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몇 번 따라서 놀러 갔던 터인데, 내가 갈 귀농지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던 것이 몇 군데를 둘러보아도 여의치 않자 문득 그곳으로 가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이 선재 씨의 이야기는 ‘이장을 먼저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장이 마을에 살러 오는 사람을 막을 권한은 없지만 그 마을은 워낙 작은 데다 집성촌이면서 한 곳에 모여 살기 때문에 이장을 먼저 만나서 상의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장을 만나러 아내와 같이 내려갔다.

이장은 서두에 ‘오시겠다면 그것은 자유다’라는 단서를 단 뒤 ‘그러나 마을의 방침은 외지인들이 아무나 함부로 들어와서 마을의 분위기를 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또 다른 진짜 단서를 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장이 묻는 말은 한 마디로 ‘김 선생님께서는 어떤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까?’였다. 기왕에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밖에서 무언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문인, 화가, 의사 등등 뭐 그런 것이었다. 바로 앞에도 한 사람을 영입(?)했는데 약초의 전문가이면서 침을 놓는 사람이었다. 아하! 난감했다. 회사를 키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아니 조직을 만들고 키우는 데에는, 조직 관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연구, 연수, 인사, 노무, 기획홍보, 영업, 해외 등등 모든 분야 임원을 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내 인생 어떻게 살아 왔는가가 처절하게 반추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를 설명하는 이런저런 긴 설명 끝에 이장이 붙인 말은 ‘아,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군요. 그러다 일찍 퇴출 되시고....’ 이게 전부였다. 일반인과 다른 것이, 당신들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 ‘바로 이 것입니다’라고 말 할 게 하나도 뚜렷한 게 없었다. 그냥 거듭되는 말이 ‘뭐든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하고 어울려 잘 지낼 수 있다’는 그야말로 ‘나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장과의 면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자신들이 바라는 인사는 아니니까 적극적으로 환영은 못하지만 굳이 오고 싶으면 와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 재주가 없다면 무얼 해서 살아가실 것인지?’였다. 그 마을이 가느다란 계곡을 끼고 앉은 터라 농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돌이켜 보면 딱히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는데 그 곳으로는 결국 가지 못했다. 지금은 책을 내는 작가 타이틀을 달았으니 이장이 환영할까 -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귀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결국엔 인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물론 아무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비싼 돈 주고 땅 사서 집짓고 살면 그만이겠지만.... 그런 것은 인력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과 어울려서 마음을 터놓고 마을 사람이 되어서 사는 것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발품이 들어가는 귀농 답사의 길을 굳이 어렵게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섬진강은 유장하게 흐르고, 계곡 속의 마을은 그림처럼 앉았으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정처 없는 귀농 답사의 발길은 또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니 어찌된 일인지 전라도에 한 번 발을 내딛으니 다시 전라도 땅으로 걸음이 이어졌다. 다음은 전남 보성의 녹차 밭.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 두 가지. 첫째는 자신만의 것을 가지자는 생각. 그것이 나팔을 부는 재주든, 자장을 만드는 기술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망치질이든.... 삼십 여년 직장 생활을 하고도, 회사 명함이 사라지면 자신이 뚜렷하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주가 무엇인지 불분명한 인생은 참으로 불행하다. 아니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재미없다. 그 날 그 순간, 곡성의 한 마을 이장 앞에서 ‘선생의 재주는 무엇이오?’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잘 난 김 이사’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

두 번째. 그 마을이 마을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쓰는 수법, 아니 ‘방법’인가? 마을 입구에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 놈을 쇠사슬로 가로 질러 잠가 놓고 팻말을 붙였다. ‘다리가 낡아서 붕괴 위험이 있사오니 차량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외래 손님은 이장에게 연락 주십시오.’ - 멋진 아이디어다. 지금 사는 동촌리에는 봄, 여름이면 서울에서 ‘산채나물 패키지 여행’ 손님들이 대형 버스로 몰려와서 우르르 산에 올라가서 나물을 뜯고 마을 공터에서 술 마시고, 놀다 가는 모습을 보면 그 마을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이곳 동촌리 산이란 곳의 산은 나물이 남아나지 않는다. 다음 해를 생각지 않고 마구 뜯고 캐어 가 버리기 때문이다. 가을이면 송이도 남아나지 않는다. 계곡을 따라 즐비하게 차량들이 늘어서 있는데, 산에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동촌리는 농촌관광을 한다고 홍보에 열심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건설의 망치 소리와 레미콘 차량의 소음이 끊일 날이 없다. 대외 능력이 뛰어난 유능한 이장을 만난 덕인데, 가슴을 부여안은 섬진강 그 마을과 가슴을 풀어헤친 동촌리 - 어느 쪽이 과연 행복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인지는 내 식견으로는 판단이 안 선다. 세월이 조금 흘러야 판명되리라. 다만 세 가지 분명한 것은 첫째 동촌리의 땅값은 올라간다는 사실, 둘째 애초에 동촌리로 오면서 바랐던 것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 셋째 세월은 흐른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은 변한다는 것.
귀농의 길 8 - 보성의 녹차 밭에서
(김용전/새우골산방)
 
달래캐기 작업. 저 멀리 파로호의 평화로운 모습이 보인다. 동네 형수님, 할머니들과 같이 앉아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일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형님 아우들과 아침부터 소주를 한잔 걸치면 진짜 취중천국.
www.naturei.net 2009-03-26 [ ]

쌍용 계곡과 곡성 마을이 불발탄으로 끝나자 이번에는 귀농본부 복덕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전남 보성의 녹차 밭에 연락을 해 보았다. 3만평 녹차 밭의 관리인을 구한다는 글이었는데 - 사진에서 많이 본 녹차 밭 그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이 동했던 까닭도 있었다. 꼭두새벽에 구파발로 가서 녹차 밭 ‘다향촌’의 사장인 손옥태 여사를 태우고 다섯 시간을 달려서 현장에 도착했다. 손 사장은 나이가 꽤 많은 할머니였는데 녹차업계에서는 여러 가지 발명품으로 유명한 녹차 박사였다.

‘다향촌’에 도착해서 보니 그야말로 사진에서 보고 말로만 듣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눈앞에 득량만이 그림처럼 출렁이고 바로 곁에는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대한다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 사장은 서울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녹차 밭 현지에는 관리인을 두어서 차 따는 아줌마들과 녹차 덖는 일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는 젊은 관리인을 두었었는데 시설물을 떼어서 싣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고 그 앞의 관리인은 형사가 와서 잡아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부도를 내고 도피 중인 사람이었는데 귀농희망자라고 속였던 것이다. 시골로 떠돌며 빈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도피자들도 꽤 많은데 손 사장은 전혀 몰랐던 모양.

문제는 거기에서 생겼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 나더니 의지는 알겠지만 본인으로서는 말로만은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보증금 3천만 원을 걸고 관리인으로 들어오라는 게 아닌가?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못 믿을 사람들만 겪어온 손 사장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리라. 그러나 사람을 한 번 더 바로보고 믿어 볼 것을 부탁했다. 돈이야 내도 되지만 보증금을 걸면서까지 그 먼 보성 녹차 밭에서 관리인으로 일을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거듭 부탁을 해서 일단 보증금 없이 ‘믿고 일을 맡겨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며칠 후 양재동 AT 센터에서 개최되는 유기농 박람회에 다향촌 제품들을 전시할 부스를 설치하는 데 나가서 일을 했다. 어쨌든 일을 맡기로 했으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나섰던 것이다. 물건을 실어 나르고 진열하고 오픈 당일에도 가서 일을 도왔다. 아내도 함께 가서 손 사장을 만났다. 보성 녹차 밭에도 다시 몇 차례 내려가서 1박 하며 상세히 둘러보고 왔다.

그렇게 내려갈 준비를 하던 보름 쯤 지난 후 손 사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보증금을 걸어 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아하, 이 곳 이 사람하고도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믿겠다고 했다가 다시 못 믿겠다니 그 판단이 왜 번복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일언지하에 보증금을 걸면서 까지는 못 간다라고 통보했다. 아쉬움도 있었다. 녹차 밭 관리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상은 이런저런 사업도 같이 벌이고 있는 중이라서 창업 회사를 키워 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창업 회사에서 성공하고 난 뒤 배신하는 오너를 보고 떠났던 길이 아니던가. 그래서 첫 답사지였던 서산 농장에도 미련 없이 가지 않았던 길이 아닌가. 너무 ‘자라에 물린 사람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믿겠다’의 번복에서 만사 인연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다음 발길은 드디어 실전을 치렀던 진천으로 이어진다. 뒷이야기지만 진천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손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보증금은 그냥 유효한 채로. 버스 지나간 뒤 손들기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였다.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는 지금의 귀농지인 동촌리를 향해서 예정된 행로를 굴러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 때는 까마득히 몰랐었다.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귀농의 길 9 - 진천, 드디어 농사 실전으로
 
지금 사는 동촌리 새우골 산방의 마당에서 보는 봄 풍경. 지나온 길에는 사진을 찍은 게 하나도 없다.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다. 기록이 남지 않아서.
www.naturei.net 2009-03-26 [ ]

귀농인은 모두 괜찮은 사람인가?

질문이 좀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 볼 단계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못 말리는 3개 단체가 있다고 한다. 호남 향우회, 해병 전우회, 고대 동문회 - 이 셋인데 나는 우스개로 이 말은 앞으로 수정되어야 할 거라고 말한다. 지역감정이나 학벌 조장을 근절하려는 고상한 뜻에서가 아니다. 이 셋에 하나를 더해서 못 말리는 4개 단체가 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귀농 동지회인데 약 3년 여 전국을 답사하면서 느낀 바, 바로 ‘귀농 선후배’라는 말 한 마디로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심지어 먹여주고 재워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정량의 노동을 해야지 그냥 무위도식은 별로 반겨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노동을 한다 하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보자마자 대화가 되고 믿어주는 관계는 그리 흔치 않다. 그만큼 귀농인들 사이에는 ‘귀농’이라는 낱말 하나로도 통하는 동질감이 있다는 뜻이다. 도시를 떠난다, 농촌에 살고 싶다, 무언가 인정(人情)을 그리워한다, 가급적 재물에 초연하려 한다, 경쟁을 피한다, 남을 배려한다 등등인데 이 말들 자체가 필자의 생각이기 때문에 모든 귀농인들의 공통점인지는 자신이 없다. 특히 재물 분야에서. 그러나 대략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귀농인이 귀농인을 만나면 선뜻 ‘나 같은 사람’으로생각하고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산다. 귀농했다는 사실이나 또는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의 인격 전부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류를 불러 올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사람을 한 면만 보고 단시간에 판단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귀농인’이라는 말에는 무언가를 버린 사람, 본질을 찾는 사람 -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인간의 이상을 찾는 사람’ 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미지이다. 나는 못 그러지만.

이런 내 생각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보성 녹차 밭 다음으로 내려가서 실제로 농사 실전을 치렀던 진천에서의 1년 기간이다. 귀농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내면까지를 아름답게 생각하고 무조건 믿으려고 했던 ‘어리석음’ 때문에 그야말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시기이다.

시작은 역시 귀농 본부 복덕방에서였다. 밭농사 5천 평을 짓는 귀농인인데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서 ‘동업자를 찾는다’는 글을 본 것이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진천으로 달려갔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평사리라는 마을이었는데 전체 가구 수는 10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나이도 거의 70 이상 - 옛날 30 가구를 웃돌던 마을이었다는데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것이었다. 그 곳에서 농사 동업자를 찾는다는 K 부부를 만났다. 정말 젊은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사람이 맹해서 남을 쉽게 믿지만, 젊은 귀농인을 보면 더 껌뻑 죽는 것이 당시 나였다. ‘야, 저렇게 젊은 나이에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살겠다고 하다니, 대단한 젊은이다’ - 이런 심정이다. 두 번을 만나 본 뒤 같이 농사를 짓기로 합의했다. 젊은 귀농인과의 농사 동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귀농의 길 10 - 가방끈 길다고 농사 잘 지을까?
(김용전/새우골산방)
 
새우골 산방 마당에서 바라본 작년 첫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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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2일 - 1년 간 먼저 농사를 지어본 뒤 아내와 합류하기로 하고 드디어 혼자 진천 평사리로 내려갔다. 승용차에 달랑 이불 한 채와 냄비 하나, 밥솥 하나, 사발 몇 개, 수저 한 벌을 들고 서울 집을 떠나는데 그 비장함은 그야말로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 못지않았다. 거처는 한 집의 창고에 붙은 쪽방을 구했다. 메주 등을 삶기 위한 아궁이를 만드느라고 임시로 만든 구들방이었는데 방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문이 엉성해서 사방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일은 밭 정리부터 시작됐다. 전 해에 수풀처럼 자라서 드러누운 풀을 불태우고, 겨우내 방치해 두었던 비닐을 걷어 내는데 재가 날아올라서 온 몸이 그야말로 탄광의 광부처럼 까만데 눈만 하얗게 껌뻑였다. 옥수수를 심었던 곳은 비닐이 뽑히지를 않았다. 며칠째 5천 평을 다 정리하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온 몸이 재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건만 더운 물이 나오는 시설이 없으니 가마솥에 물을 데운 뒤 세숫대야에 찬물과 섞어서 목욕을 했다. 3월이지만 꽃샘추위가 쌩쌩 거릴 때라 찬 바람이 사정없이 부엌을 들이쳐서 몸에 끼얹는 물이 시리게 느껴졌다.

가스 시설이 없으니 블루스타를 가지고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니 자연 반찬은 날마다 한 가지 - 김치 찌개였다. 어떤 날은 정말 힘들어서 김치 찌개 조차도 만들기 귀찮으면 그냥 막걸리에 밥을 말아 먹고 잠들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행복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도전 의욕, 3년간 별러 오던 일에 대한 실행 의지 등등이 겹쳐서 몸은 힘들고 지쳐도 정말 마음은 편했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서운할 것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만의 희열이었다.

그러나 집주인 아주머니와 영감님,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날마다 수군댔다. ‘창고 방 김씨 언제 서울로 돌아 간디야? 아 저 나이에 멀쩡한 사람이 왜 여기 와서 저러는지는 물러도 오래 못 갈끼여! 암만, 오래 못 가고말고. 농사는 아무나 짓남?’ - 수군대거나 말거나 일만 했다. 말로 해명하고 각오를 이야기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로지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고,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었는데, 전투의지는 충만했다.

작목은 K와 의논한 뒤 고추, 옥수수, 쥐눈이 콩, 호박을 심기로 하고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17만원으로 중고 경운기를 사서 밭을 갈았다. 로터리는 남이 버린 것을 주워서 썼다. 생전 처음 해보는 경운기 운전을 그야말로 원 없이 해 보았다. 보름 정도를 밭 갈고 로터리로 두들기는데, 얼마나 손아귀에 힘을 주었는지 저녁이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이 쥐어지질 않아서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밥을 먹었다. 새벽 다섯 시면밭에 나가고 해가지면 들어와 잤다.

언젠가 무슨 고전을 읽는데 원님 앞에 잡혀온 한 농사꾼이, 죄를 자백하라고 닦달하는 호령에 “하이구, 나으리 저는 해뜨면 밭에 나가 엎어지고 해 지면 마누라 배 위에 엎어지는 일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요?” 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내가 그 짝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 날인가?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발이 빠져서 걷기가 힘들 정도의 눈이 30센티는 족히 될 두께로 대지를 덮었다. 백 년만의 봄철 대설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차 생각지 못한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방은 아궁이에 불을 안 때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는지라, 할 수 없이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불을 지폈다. 그런데 정신없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소리 소문 없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는데, 오호라 땔나무를 쌓았던 곳으로 가보니 그대로 눈이 내리 덮여서 다 젖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옆에 분명히 어제까지도 나란히 쌓여 있던 집주인 아저씨의 장작이 어느새 비닐을 덮고 끈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이런! 어떻게 된 일일까? 아침나절을 아무리 방안에 앉아서 생각해도 방은 식어 오고 땔감은 없고 도리가 없었다. 안채로 집주인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이고, 창고 방 김씨가 왠 일이여? 들어와.”

나이 일흔 넷의 영감님. 말은 안 해도 왜 왔는지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염체불구,

“저....아저씨, 땔감 좀 쓰게 해 주십시오. 눈 녹으면 나중에 제가 채워 놓겠습니다.”

아저씨가 스윽 나를 훑어보더니 하시는 말씀

“아 그러게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나무를 한 데다가 그냥 두면 어떡혀? 그려, 갖다 쓰고 채워 놔.”

나는 ‘아저씨 장작 비닐로 씌울 때 왜 저한테는 이야기 안 해 주셨어요?’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뒤통수에 대고 독백처럼 하시는 말씀

“어이구 웬 놈의 눈이 이 봄철에 난리여? 하늘을 보니께 쉬 그치지를 않겠구먼. 어이구 밭도 갈아야 되는디....허리 아파 죽겠구먼. 누가 대신 갈아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리 하늘을 봐도 눈이 그칠지 말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아저씨는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나에게 한 수 크게 가르쳐 준 것이다. 자기 장작 덮을 때 친절하게 알려주거나 같이 덮어 주었다면 오늘날 이 때까지 이렇게 기억이 깊이 남아 있을까?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독백이 엄청 크게 들렸다. 그리고 가슴 속에 커다란 울림이 들려 왔다. 무엇이었을까?

‘가방 끈 길다고 농사 잘 짓는 거 아니고, 의욕만 있다고 시골 살이 되는 거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석, 박사가 무슨 소용이랴? 하늘을 봐도 도통 모르겠는걸. 그리고 눈 올 거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도 장작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걸.

영감님 장작을 아궁이에 때면서 문득 ‘이등병의 노래’가 떠올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그렇다. 학벌도, 나이도, 전직 임원도 다 소용없다. 그야말로 이등병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원 없이 잤다. 눈 덕분에.
귀농의 길 11 - 농사는 아무나 짓나?
(김용전/새우골산방)
 
2006년 화천읍 토고미 마을에서 있었던 귀농도우미 1기 교육에서 강의를 마치고.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www.naturei.net 2009-04-10 [ ]

뒤집어진 경운기
옥수수 심을 밭을 만든다고 경운기로 밭을 갈 때의 일이다. 경사가 좀 심한 밭이었는데 생 날 초보가 무엇을 알랴? 아래쪽부터 쟁기를 들이댔는데 중간에 경사가 좀 심한 곳에를 가자 경운기의 기울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위태위태한 놈을 어찌어찌 갈아 가는데 어느 순간 덜컹하더니 휘청 경운기가 뒤집히고 말았다. 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뒤집히면서 클러치 레버가 부러져서 이틀을 일 못했다. 그래도 달려온 집주인 영감님이 사람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했는데 경운기 위험한 것을 그 때 알았다.

경사진 밭을 위쪽부터 갈았으면 위쪽 바퀴가 파인 고랑으로 들어가니 좀 나았을 텐데 그걸 반대로 갈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영감님은 지나가면서 뻔히 보아도 웃기만 한다. 그리고 넘어진 다음에야 와서 ‘어이구 김 씨, 이렇게 해야 되는 기여!’라고 코치한다.

로꾸거!
고추밭을 만든다고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다음에는 피복기를 달아서 비닐을 씌웠다. 천 평이 넘는 밭을 혼자서 작업하는데 길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밭 안 쪽으로 랄라라라 신나게 씌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면서 지나가는 영감님이 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뭐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어허 내가 또 뭘 잘못하는가보다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틀린 게 없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씌우고 보자. 그런데 이상하다. 관리기가 힘이 없다. 앞에서 힘을 주고 잡아끌어야 겨우 달려온다. 기계가 중고라서 그런가 부다 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기계를 끌었다. 땀은 범벅이 되었다. 점심 먹으러 집으로 가는 영감님이 또 미소를 짓는다. 이런 정말, 저 야릇한 미소는 도대체 뭐지? 아이구 힘들어 나도 밥이나 먹고 하자.

점심을 먹고 나와서 또 기계를 돌리려고 하자 그제서야 슬금슬금 다가온 영감님 -

“김 씨, 기계가 잘 안 나가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는지 중고라서 그런가 봐요.”

라고 나름 이유를 댔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

“중고 좋아하시네. 바퀴를 거꾸로 달았슈! 좌, 우가 바뀌었다구.”

이게 무슨 소리? 피복기 바퀴에 좌, 우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아는 건데....

“아 이게 핸들을 한 바퀴 홱 틀어서 돌려 쓰잖여. 근데 김 씨는 그걸 가지고 앞뒤를 잘못 생각한기여. 바퀴를 잘 봐봐.”

어디? 정말 쇠바퀴에 달린 갈퀴를 보니 반대로 되어 있다. 갈퀴로 땅을 긁으면서 돌아야할 바퀴가 반대로 되어 있으니 전혀 힘을 못 쓸 수밖에. 아니 그럼 아침에 갈 때 이야기해주지.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 주나? 어찌됐든 반나절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다. 바퀴를 바꿔 끼우고 일을 하는데 어찌나 잘 되는지!

아 그냥 끝까지 혀 봐!
바퀴도 제대로 끼웠겠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으리. 속도를 내는데 이상한 일이다. 영감님은 또 지나가면서 실실 웃는다. 비닐 덮는 흙이 부실한가? 그것도 아니고....이번에는 슬쩍 물어봤다.

“아저씨, 혹시 제가 뭐 일을 잘못하는 거 있나요?”

“뭐얼~. 잘 하는구먼. 아 그냥 끝까지 혀 봐!”

그럼 그렇지. 드디어 밭 안 쪽 끝까지 다 씌웠다. 근데 어라? 기계를 어디로 끌고 나오지? 밭이 전부 비닐로 덮여 버렸는데. 스스로를 가둔 꼴이 되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두둑 끝자락께로 기계를 끌고 나오니 씌워 놓은 비닐이 쇠바퀴 밑에서 폭폭 구명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영감님의 미소를. 어김없이 나타난 영감님.

“기계를 안 쪽부터 들이댔어야 하는 기여~! 일을 마치면서 기계가 빠져 나올 길을 생각해야지 무작정 바깥쪽부터 들 가면 워떡 헌디야? 나 참!”나 참은 내가 할 소리였다.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기나 한단 말인가?

냇가로 뛰어!
옥수수 모종을 심는 날이 왔다. 천오백 평 가까이 심어야 되니 아주머니를 세 명 빌렸다. 경운기로 물을 주면서 심을 계획인지라 전날부터 큰 물통을 빌려서 수도 물을 받는다고 시간을 꽤나 들였다. 그런데 또 아저씨가 웃고 지나간다. 아 미치겠다. 뭔가 이상한 게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뭘까? 이번에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아저씨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분무기도 점검하고 호스도 점검하고 물총도 점검했다.

드디어 다음날 - 아주머니들이 다 왔다. 경운기를 돌리고 물총으로 두둑에 구멍을 뚫으면서 물을 준다. 포트를 나르고 구멍에 모종을 놓고 나면 아주머니들이 잽싸게 꽃삽으로 흙을 덮는다. 그런데 앗! 갑자기 모든 일이 멈춰 섰다. 물총으로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큰 고무 통에 물을 가득 채운 뒤 다시 그곳에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연결해 놓았는데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물을 계속 공급하면서 쓰니 연속해서 작업이 되리라는 계산이었는데....아 그러나 이게 웬 일 - 분무기를 통해서 물총으로 나가는 물의 양이 엄청나서 일을 시작한 지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물이 동이 나버렸다. 들어가고 나오는 물의 양을 계산 착오한 것이다. 일당을 주고 빌려온 아주머니들은 눈을 말똥거리면서 밭둑에서 쉬고 있다. 망연자실!

순간 마치 어디에서 숨어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영감님이 짠하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던지는 말씀,

“경운기 끌고 냇가로 뛰어!”

“거긴 너무 먼 데요?”

“내가 호스 꺼내 놨어. 빨랑 가서 연결하고 끌고 와!”

농사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이야 어디를 가 봐도 물을 주려면 다 호스를 냇가나 도랑에 담그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농사는 생판 - 책상에서 일만 하던 먹물이 그걸 어떻게 알았으리? 그렇게 일은 다시 시작되었고 무사히 옥수수 모종을 다 심을 수 있었다.

나 칠십년 배운 거야!
고추를 심고 나서 어느 정도 자라자 지주대를 세울 때가 되었다. 당시에도 농기구 점에 가면 쇠로 만든 지주대가 있었지만 단 한 푼이라도 아낀다고 마을 분들처럼 산에 가서 나무를 잘라서 만들었다. 무려 1000개가 넘는 나무막대를 만들려니 장난이 아니었다. 어쨌든 부지런히 만들어다 고추밭 한쪽머리에 무더기무더기 지워서 쌓아 놓았다. 이제는 저 놈을 고추 네 다섯 그루당 하나씩 박아 넣고 끈으로 매주면 되는 것이다. 오호라, 그런데 지주대를 한쪽에 나란히 나누어 준비해 놓은 걸 보고 영감님이 지나가다가 또 웃는다. 나무를 너무 가느다란 놈으로 잘라왔나? 이제는 기다릴 수없다. 벌써 몇 번째이던가? 꼭 일이 터지고 나서야 알려주기를.

“저 아저씨, 또 뭐가 어설프게 됐습니까? 왜 웃으세요?”

“아니여. 잘 혔구먼. 그냥 그대로 혀봐.”

“아닙니다. 아저씨 웃으시는 거 보니까 또 제가 뭘 모르고 일을 하는 거 같은데요. 좀 미리 알려 주세요.”

“그리여? 그럼 알려주지. 나무를 고추밭 양쪽 머리에 나누어 놓아야 멀리 왔다 갔다 안 하고 지주대를 박을 거 아니여! 저렇게 한 쪽에만 놓으면 고추밭이 이렇게 긴데 가지러 왔다갔다 엄청 힘들거구먼!”

아하! 그렇구나. 에라! 그렇다면 내친김에 물어 보았다.

“근데요, 어르신! 아 그런 거를 미리 좀 알려주면 수고도 덜하고 훨씬 좋잖아요. 왜 꼭 일을 벌여 놓은 다음에야 알려주세요?”

“미리? 아 언제 김씨가 나한테 그런 거 물어 봤남? 혼자 알아서 다 허더구만 그랴? 그리고 이런 거 나도 칠십 년이나 배운 거여~!”

지금 와서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방 끈 길다고, 도시적 잔 계산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시골에서 초등학교도 안 나온 영감님에게 고분고분 물어보면서 했겠는가? 또 미리 일러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게 무슨 말인지를 해보지 않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걸. 그러기에 말씀은 미리 안 해도 어떤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신경을 썼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해결해 주셨던 것이다. 그야말로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속으로는 혼자 와서 농사짓는다고 설치는 생 날 초보 농사꾼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고추 밭에 지주대를 세울 때 쯤 해서 동네 사람들의 '서울로 언제 갈껴?'하는 수군거림은 사라져 버렸다. 영감님은 길 가다 나를 보면

“어이구, 김 씨 하는 거 보니께 소출은 몰라도 일단 올 농사는 해내겠구먼.”

이라고 격려를 해줬다. 해외지사를 성공적으로 개척했을 때 ‘잘했다’고 회장이 건넨 격려 한 마디 보다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잔 계산이 없는, 그야말로 농사에 대한 순수함이 배어있는 농부들끼리의 교감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비로소 나는 농부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