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돈오

後凋1 2010. 11. 7. 07:41

단박 깨침이란 무엇인가(1)

 

 

 

설정 스님

(수덕사 방장)

 

 

(주장자 세 번 내리치시고)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소승이 조금 전 짧은 게송을 하나 읊었습니다.

내용인 즉, 산색은 문수안이라.

산색뿐만 아니라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문수의 눈이다.

수성은 관음이라. 물소리는 그대로 관세음보살의 음성이다.

 

법문을 들을 때 마음을 다 비워 듣는다면 굳이 제 법문이 아니더라도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문수의 모습일겁니다.

또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 관세음보살의 음성일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법을 간절히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설해주지 않으면, 법을 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법문 듣는 사람이 법문 듣는 자세가 돼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문한다면, 그 또한 법을 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부대중은 어느 위치, 어떤 자세로 법문을 듣는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입니다.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편안하게,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안 됩니다.

그 근본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스스로 자신을 밝히고 자성을 깨우치게 해 무한한 생명을 얻고 무한한 나를 얻게 해 줍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49년 동안 많은 방편문을 열어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수행방법에는 염불도 있고, 주력도 있고, 간경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습니다.

한용운 선사(韓龍雲ㆍ1879~1944)는 “선이라고 하면 이미 선이 아니다. 선이 아니면서 선이요 선이면서 선이 아닌 것이 선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국불교는 통불교입니다.

통불교를 지향하지만 수행법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지향합니다.

교리를 다 알았으면 내려놓고 선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禪)입니다.

그 자리에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입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치는 것입니다.

찰나에 무명을 다 끊어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오는 무념을 종(宗)으로, 청정을 체(體)로, 지혜를 용(用) 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무념, 무심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도 일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무념, 무심, 보리, 열반, 해탈, 견성,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도, 돈오라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또한 중도를 일컫습니다.

특히 선가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합니다.

일체 것을 다 부정합니다.

텅 비어 비어있다는 그 자체마저 없습니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 ‘금강신품’에 ‘이 마음자리는 밝고 밝아서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것은 일대사 인연입니다.

일대사 이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 개시오입(開示悟入)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한 물건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자신을 비춰보면 사람은 티끌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것에 육합(六合)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이 한 물건이야 말로 삼재(天地人)의 주인입니다.

만법의 왕입니다.

높고 높아서 비교할 수 없고, 넓고 넓어서 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신비롭고 신령스러운 이 한 물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 물건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습니다.

천지보다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雪山)에서 6년 동안 고행하시고 바로 이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달마 대사(達磨ㆍ?~528?)가 서쪽에서 오신 것도 중생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법은 상대법(相對法)이자 생멸법(生滅法)입니다.

이 세계 삼라만상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나 생멸법으로는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 몸은 영원한 것입니다.

 

[출처] 단박 깨침이란 무엇인가(1) - 설정 스님 (부처님 찾아 떠나는 여행) |작성자 성민

육바라밀

 

대승의 보살정신이 대두되면서 중요한 수행덕목으로 부각된 육바라밀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불교 수행의 핵심.

 

이 육바라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살의 뜻을 명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이란 보리살타(普提薩睶; Bodhisattva)의 준말입니다.

 

<보리>는 깨달음, <살타>는 중생이라는 뜻으로서 깨달음을 구하는 또는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이란 말입니다. 보살은 중생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최상의 과제로 삼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법장비구(法藏比丘)는

「내가 부처가 된다 해도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다.」고 하였듯이 보살을 동사섭(同事攝)으로 이타행을 서원한 이를 말합니다. 이들이 사회와 중생을 위해 하는 수행이 곧 육바라밀입니다.

 

바라밀(波羅密; Paramita)이란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완성(혹은 궁극의 목표)에 이르는 길>-상구보리-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여섯가지의 서원이며 길인 것입니다.

 

(1) 보시(布施)바라밀 :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보시(dana)는 시여(施輿)라고도 하며 큰 선행의 길이됩니다.

재물을 베풀어 주는 것(財施), 부처님 법을 전해 주는 것(法施), 타인에게 정신적인 안도감을 주는 것(無畏施)의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베풀어 주되 베풀어 준다는 생각이 없는 보시(無主相布施)가 되어야 진정한 보살의 수행이 됩니다.

 

(2)지계(持戒)바라밀 ;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5계을 잘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대승보살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악을 그치게 하며, 착한 일을 행하고, 중생에 이익되는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3)인욕(忍辱)바라밀 ;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만 분한 일을 당해도 참지 못하거나 좌절하는 등 마음의 동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보살의 가야할 수행의 길입니다. 자기라는 개체에 집착하지 않고 평하스러운 마음으로 깊은 애타심을 가짐으로써 인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정진(精進)바라밀;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름을 없애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임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태어난 것은 반드시 없어지느니 게으르지 말라. 나는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각에 이르렀느니라.」

 

(5)선정(禪定)바라밀 ;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사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존재의 참모습을 밝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이기 때문에 선(禪)은 특히 중요한 수행법입니다.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아니고 행동과 말 등이 모두 이와같은 고요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수행하여야 합니다.

 

(6) 반야(般若)바라밀 : 반야는 최고의 지혜란 뜻이며 모든 분별심을 떠난 지혜(無分別智)로서 앞의 다섯 바라밀을 이끄는 기둥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모든 존재는 스스로의 성품이 비어(空)있음을 보고 실상을 직관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보살이라면 마땅히 이 지혜를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바라밀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