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자명종에 눈이 떠 부지런히 산행 행장을 차린다. 오늘 백두대간에 참여한지 네 번째다. 오랜 기간 나태한 생활에 젖어 살아온 탓에 함께 산행을 하는 산우들보다 한참 걸음이 더디고 힘들기는 더하니, 매번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긴장된 마음이다.
뽀식이 놈이 밥통 앞에 서서 발로 밥통을 걷어 차며 밥을 달라고 보챈다. 멜빵달린 바지차림을 하니 어느 순간 놈이 그저 강아지려니 생각이 안 들고 인격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놈도 제가 사람인양 착각을 하고...
아직 여명이 가시지 않은 동짓날의 아침, 안성 휴계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싸가지고 온 주먹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희끗희끗 눈발이 내린다. 처음 산악회 버스를 탔을 때, 자리도 비좁고 불편하며 마뜩치 않았는데 차츰 익숙해져 간다. 보너스로 새벽 출발지 대화역에서 승차후 중간 중간 여기 저기서 회원들을 태우고 산행 기점까지 가는 동안 모처럼 호젖한 명상의 시간을 갖을 수 있게 된다. 그 시간 중에 다른 어떤 때보다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고 생각의 방향이 긍정적이고, 미워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내 자신 성찰의 시간으로 알차게 채워간다. 참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삶의 공간에서 버스 안의 이 좁고 옹색한 공간이 어느 時空間보다 더 알차고 값진 思念의 場이 된다니. 사실 우리의 생활 공간은 온갖 외부의 자극과 주변의 쓰잘데 없는 번거로움, 유혹, 의무감, 배려해 할 이웃들... 읽어야 할 책들,고지서, 광고지, 신문 잡지, 각종 모임 안내장, 부고 청첩장, 수시로 울리는 핸드폰 소리, 메시지 ....온갖 잡다한 것들로 인해 전혀 자신의 내면과 마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좁은 囹圄의 공간에서 큰 인격들이 나왔나 보다. 만델라 김지하시인 신영복교수에 이르기까지.
영혼은 외려 육체의 구속에서 더 자유를 누릴 수 있나보다.
버스가 산행 기점에 이르기 전에 산에 오를 채비를 부지런히 한다. 무거운 보온병과 꼭 필요치 않은 것들은 모두 차에 두고 최대한 간편차림으로.... 10:40 경 간단히 기념사진을 찍고 27명 일행이 덕산재 주차장에서 이어지는 가파른 오름길로 들어선다. 선두에 5-6명을 두고 부지런히 뒤쳐지지 않으려고 초입새부터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금새 양쪽 종아리 바깥 부분이 경직되어 온다. 벌써 여러 차례 비슷한 증세가 있는데 어찌 대처해야 할찌 난감하다.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준족의 산우들이 달리듯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여니라는 50대 후반의 젊고 씩씩한 할머니도 휙 앞서 간다. 절대 뒤져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며 아픈 다리를 이끌고 능선 위로 올라선다. 주변 풍경이나 지세를 살필 여유도 없다. 그리하여 간신히 여니님과 중간그룹에 함께 섞이어 1시간여를 쉬임없이 걷고 난 후 이어지는 오름길에서 잠시 여유를 갖고 뒤돌아서서 덕산재 건너편 지난 구간의 삼도봉과 대덕산을 사진에 담는다.
노루새끼를 닮았나? 어느 지점 지점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보는 버릇은...
성황당재를 지난 참나무 숲 내리막길. 아직까지 날씨도 괜찮고 걷기에도 무난하다.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나보다 몇 살 연배의 동행이 사진을 찍는 동안 나를 앞질러서 부항령쪽으로 내려간다.
부항령을 조금 못 미친 내리막길 지도상 853봉을 지난 내리막길에서 저 멀리 백수리산이 눈 앞에 드러난다. 오른 편 봉우리가 백수리산인데, 그 당시에는 몰랐고 그저 가야할 대간길의 어느 봉우리려니 생각했다. 대간길 마루의 이 공간 씨날줄 속에 어느 공간에 내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눈 앞의 길만 바라보며 걷는 청맹과니 내 신게가 답답하기 그지 없다. 준비성 없고... 내 삶의 모습을 그대로 그대로 반영하는 듯...
마주한 무명의 왼 봉우리와 백수리산을 있는 긴 능선은 마치 여인의 젖가슴같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번 삼도봉을 내려오며 바라본 대덕산 능선이 여인의 허리로부터 이어지는 둔부의 아름다움을 연상케 했는데 이번엔 이어진 두 봉우리가 봉긋한 여인의 가슴으로 눈에 들어와 몇 번이고 멈추어 서서 샷터를 눌렀다. 그렇다! 대지는 온갖 지상의 피조물을 품어 안는 母性이다 . 그 대지의 넓고 풍성한 품을 눈 앞의 산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우뚝 서있다.
아름다운 대지 母神의 앞 가슴을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내리막길 어느 곳에서도 좋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 아래 부항령고개 팔각정이 보이고,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몸이 아파 뒤쳐진 후미그룹의 일부를 기다리고 있다.
한 참 뒤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부항령을 조금 지난 오름길 부근에서 몇 명의 일행이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하고 있어 동참하여 싸가지고 온 간편식(찰떡, 꽂감, 사과 야콘등)을 먹으며 대지의 젖가슴을로부터 受乳를 받는 기분.
점심 전까지는 몸의 열기로 윈드스토퍼와 방한조끼를 벗고도 땀을 많이 흘렸는데, 잠시 점심을 먹으며 앉아 있는 사이 추위로 배낭 속의 옷을 꺼내 입었는데도 북서쪽으로부터 찬눈바람이 몰려 와 춥고 손이 시리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추위에 바쁘게 배낭을 메고 가파르게 이어진 왼편 봉우리로 들어서는데 일행 중의 여자들이 볼일을 보아야 하는 듯 뒤로 처진다. 으크... 이 추위에 살을 드러내야 하는 여성들은 아마도 이승에서 남자들보다 분명 더 많은 수행을 하고 가는 셈. 우린 그저 몇 걸음 길 옆으로 비껴서서 지퍼만 내리면 되는데...
볼일로 뒤에 처지 일행을 앞질러서 혼자 왼편 봉우리를 오르며 대지의 왼편 가슴을 더듬는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는다. 중턱에서 바라 본 백수리산 봉우리가 서편에서 몰려온 운무에 가려진다. 그리고 잠시 후 운무 속에 모습을 감춘다.
일행을 뒤로 하고 15분여 혼자서 걷는다.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날씨는 더욱 험악해지고 서쪽에서 강한 눈구름이 바람과 함께 몰아쳐 와서 시야를 막는다. 갈잎이 수북이 쌓인 내리막길 능선을 지나 백수리산 오름길의 정상 조금 못미쳐서 지나온 왼평 봉우리를 사진에 담았는데 잠시 후 운무에 가려서 봉우리가 사라졌다.
백수리산 정상에서 힘든 걸음을 잠시 멈추고 추억을 담는다. 땀으로 흠뻑 졎었던 모자와 그 안에 밭쳐 쓴 손수건이 추위에 얼어 붙었다.
북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찬 바람에 실려 온 운무로 저만치 앞이 안 보인다.
오늘 구간은 전북과 경북을 경계하는 마루길로 삼도봉까지 이어지고 삼도봉에 이르러 충북 영동군을 북으로 삼도가 경계를 맞대고 있게 된다. 북으로 이어진 마루길이 갈잎에 덮인 채 그새 내린 싸락눈으로 하얗게 덮여있다. 아직 경사길이 아니라 아이젠은 하지 않고 스틱에 체중을 많이 실은 채 걷는다.
대간길이 물을 나누었으니 당연 사람들 삶의 공간도 크게 나누어 마루 왼너미로는 전라도 무주 오른너미로는 경상도 김천. 이길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길이고 갈잎과 흰눈 쌓인 마루길 아래로 마루금이 있을테고 좌는 전라 우는 경상. 왼발이 전라를 짚고 오른 발이 경상을 짚고, 때로 전라와 경상을 넘나드며 북으로 북으로... 서편에서 몰아치는 눈바람이 왼뺨을 때린다.
1시간 넘게 내린 싸락눈과 빗겨 분 운무 속에 나무와 갈대에 운무가 엉키어 얼어붙었다. 상고대.
이번 구간은 이정표가 아주 드물게 설치되어 있고, 운무로 시계마져 가려져서 대간길 초행인 내게는 지나는 구역이 어데쯤인지 어름조차 할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운무에 가려진 산 위 개활지 부근에서는 몰아친 바람에 춥고 손이 많이 시렸다. 배낭 속에 준비한 스키장갑을 꺼낼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귀찮았다.
아마 이쯤이 구간 도면상의 박석산 정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표지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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