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농자료

[스크랩] 블로그에서 이남곡 아저씨를 보다^^

後凋1 2007. 4. 1. 09:53

방금 뭔가를 찾다가 우연히 아저씨의 글을 발췌한 블로그를 만났답니다.

'어~아저씨다'하는 반가운 마음^^

굉장히 긴 글이었구, 처음 보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아저씨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삶의 궤적과 고민의 행적...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신지...직접 이야기 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졌답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뭔가 해봐야지 하는 의욕이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제가 있는 곳에서 좋은마을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퍽 스치고 지나갑니다.

(갑자기 생각이 널뛰기를 했답니다. 글도 널뛰기를 하는 군요.^^)

 

아저씨의 글을 퍼왔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진리 실험


이남곡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려 하니 많이 망설여집니다.

특히 제가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하려고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저 나름대로는 일관되게 뭔가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다고는 하나, 그것을 감히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제가 살아온 과정을 떠올려 볼 때 너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저도 이 시대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와 사회는  우주가 시작한 이래의 역사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인격의 부족함이나 비겁함 때문에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굴절되었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주관적으로는 ‘진리 추구’를 일관된 목표로 살아 왔다고는 생각하기 때문에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분들께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제 사상이나 실천이 변해 온 과정을 차근 차근 살펴보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분명히 어떤 전환점은 있는 것 같은데 예컨대 누구하고의 만남이라던가, 어떤 사건이라던가, 새로운 삶의 시작과 같은  시점은 있지만 그 전후가 쭉 이어져 있어서 딱 잘라서 여기서부터 이렇게 변해 왔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다 보니 사실 제 사상이라는 것도 전부가 다 그 조합(組合)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러나 대강의 변화과정을 말씀드리는 것은 저 자신을 돌아보는데서도 필요하고 다른 분들께도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물론 평생을 통해  변하고 각각의 나이 대가 다 중요하겠지만 저에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갖는 의미가 남다릅니다.


대학시절


지금까지의 제 사상과 실천이 나아온 것을 보면 그 시절 입력(?)된 생각이 가장 큰 방향타(方向舵)역할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1963년)는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후진국이었고, 이제 갓 피어나려는 민주주의가 쿠데타에 의해 꺾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세에 의한 해방과 타율적 분단, 식민지 잔재의 불청산에서 오는 부정의와 그 바탕에서 오는 부패, 부익부 빈익빈의 천민자본주의, 절대 빈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황폐화된 진보의 전망, 한일회담 과정에서의 민족적 모멸감 등이 저에게 보여 온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보여온 세계에서 저의 길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끌림으로 된 것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 그리고 불교였습니다.

그 당시 생각이야 지금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경향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느낍니다.

아마 정서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끌림은 부강하고 존경받는 민족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 같고, 그 길은 자유와 평등이 가장 잘 실현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마르크스가 현실적으로 다가 왔었던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그것이 제 業이나 뭐 그런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에는 저 자신의 속마음이 너무나 불교에 끌리는 바가 컸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 가지가 서로 상용할 수 없는 것이 많은데도 이 세 가지를 통합하고 싶어한 욕구가 저의 그 후의 삶을 방향지워준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때 그런 자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이 길 즉 사회현상의 변혁의 길과 마음의 세계의 변혁이 궁극적으로 하나로 되는 그런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두 길이 서로 다른 길이었기 때문에 능력이 턱 없이 모자란 저 같은 사람이 이 길을 가기에는 험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40년에 걸친 고뇌와 실천 들은 바로 이 두 길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제 나름의 삶을 통해서 진리 그 자체도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도 ‘중도(中道)’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변해 가는 과정도, 한 사람의 관념계의 변화도 바로 이 중도를 발견하고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이 곧바로 중도에 이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그 극단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변증법적 진화의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이런 여러 가지 극단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중도’를 향해 나가고 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말씀드리는 과정이 다소 두서 없을지 모르지만 그런 과정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변혁의 길      


대학 시절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 변혁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 후 약 15년 동안은 이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당시는 냉전적 사고가 지배하고 레드 콤플렉스가 강하던 군사 정권 시절이라 활동이 지하 비밀 활동이었는데 당시는 가장 근본적이고 선진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었겠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극단적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성격 안에 근본주의적 요소가 이런 선택을 하게 했을지 모르겠읍니다만, 동시에 이런 근본주의적 요소가 제 사상을 근원에서 다시 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시절 농촌 지역의 교사로 시작(변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농촌 지역 선택)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읍니다만 궁극적인 관심은 총체적 사회 변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 계급적 관점과 투쟁 등에 대해 제 내면으로부터 점점 커지는 ‘이게 아닌데’ 하는 내면의 소리에 부딪치게 됩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계급적 관점과 투쟁의 논리’와 ‘증오와 투쟁을 넘어선 인간상에 대한 욕구’가 자신 안에서 조화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이것이 대단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나름대로 타협한 것이 우선 현상계에서 힘을 획득(변혁에 성공)한 다음 지금까지 많은 변혁운동이 범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더 급진적이 되고(사실은 불안정하다고 보아야겠지요), 마침내 그 일 때문에  4년 동안 징역을 살게 된 사건과 관계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신 말기의 엄혹한 사정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저로서는 (다른 분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일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갈등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져 갔고, 자신의 어정쩡한 타협책이 얼마나 자기 합리화이고 미망인지를, 따라서 결국 어느 쪽도 진실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과 결별하게 되었지만 그 후  결국 그 일 때문에 4년의 징역 살이를 해야 했고 이것은 저에게 다른 의미에서 좋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자신이 지금까지의 생각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다음의 몇 가지가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첫째는 사회주의권의 실태를 보면서 ‘사람과 물질이 준비 안 된 혁명의 실패’를 보았고, 그것이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아니 제 자신의 이야기라는 뼈아픈 자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계급적 증오와 권력투쟁으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상은 동기가 새로운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으면 결국 새로운 지배 구조의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선명하게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그런 권력에의 욕구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하는 것이 뼈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사유재산을 철폐한다 할 지라도 이윤동기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람들의 동기가  생산력을 더욱 높일 수 있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는 사회제도로서 뿌리 내리기 힘들다는 것이 보여 왔습니다.


둘째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생산력이나 사회제도에 조응하는 면도 있지만 그 반대도 역시 성립한다는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을 진보시키기 위해 그 사회적 존재를 변혁해야 할 때도 있지만, 사람들의 의식에 조응하는 사회 시스템 만이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보편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몇몇 나라나 자본가들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의식과 욕구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류의 보편적 욕구는 개인을 억압하고 있던 여러 가지 제약들 즉 봉건적, 신권적,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제약들 또 이런  제도, 규범,  인습들로부터 개개인을 해방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이기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려 그것이 결국 스스로를 어렵게 하겠지만 그것을 일반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가장 편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것을 경과하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집단주의는 생명력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만 그 길은 계급투쟁이나 독재의 길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저 자신도 자본주의로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없다라는 신념에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은 없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회상, 인간상  그리고 그 이행 방법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편을 잡으면서 대학 시절에 보지 못했던 고전을 많이 접하면서 자신 안에 있던 다른 요소들이 큰 자양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는 이것을 종교적 성향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읍니다만, 저로서는 이런 고전이나 성인들과의 만남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숭고본능을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징역을 살면서 만났던 데이야르 싸르텡 신부는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지위나 역할, 궁극적 진화에 대한 신념 등은 협애한 계급적 관점이나 민족적 관점을 벗어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류의 정신계의 탁월한 스승들의 가르침,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숭고본능들이 구체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원리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진정한 혁명의 길이라는 것이 생각되었습니다.


새로운 문명 탐구


징역을 살고 나와서 가계를 꾸리는 일에 매달리면서도 이런 저의 내면적 욕구는 삶을 결코 편안하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시기 법륜 스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르겠읍니다.(이 때의 생각은 불교사회연구소 회지 ‘誓願과 連帶’ 창간호에 실려 있습니다)

특히 이 때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이라는 테마로 진행했던 세미나들은 우리들의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일반적으로 사회진보의 길이라고 믿어져 왔던 신념들이 무너지면서 보다 근본적인 길을 발견하려는 마음들이 모였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문명이라고 할 때도  서로 무척이나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견해는 지금까지의 문명을 부정하는 기조 위에 서기도 합니다.

특히 생태적 세계관이 넓혀지면서 지금까지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나 물질적 생산력을 반대하는 견해들도 많이 나타납니다.

당시 저로서는 이것도 극단으로 치우치면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로 이어져 있는 우주(장 회익 교수는 우주 만이 하나의 생명단위라고 하시지만) 안에서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제대로 신장시켜 나가는 것이 사람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의 문명의 폐해가 큰 것에 눈이 돌려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이상적인가를 탐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 새로운 문명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적 진화에서 인간 정신의 출현은 대 사변입니다.

이 인간 정신의 핵심인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변혁하는 일이 새로운 문명, 새로운 진보의 최선단(最先端)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동안의 인간의 지능은 주로 외부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 특히 인간의 가치체계를 변화시키는데는 그다지 큰 진전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장회익 교수님은 이것을 ‘ 행위능력과 가치이념체계의 모순’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서로 순환합니다. 생태계의 자연적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인간도 동물로부터 진화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자기 중심성은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위능력에 의해서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서는 생존자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생태계마저 존립의 위기에 빠트립니다.

예컨대 불을 발견하고 이용한 인간은 마침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원자력을 에너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행위능력을 발전시켰지만 자기중심적 본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핵전쟁의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인간의 행위능력은 자연적 균형을 파괴할 정도로 커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을 억제하여 자연적 균형으로 돌아가게하는 것은 아무런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때입니다.

이것만이 현실적이며 인간도 자연도(사실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함께 살리는 길입니다.

다시 말 해 인간의 자기중심적 가치체계를 변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변혁에 성공하지 못하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대체로 이상과 같이 이해하고 저도 동감입니다만, 저로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인간의 지능은 위기에 처하여 자신을 멸망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성인들이 가르쳐 왔고 지금까지는 주로 종교에서 이야기해온 ‘자기를 넘어선 성인의 길’이 이제 보통 사람들의 길로 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에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자각을 확대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사회현상과 유리되던(공자나 석가 예수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고, 지금도 종교적 추구와 구체적인 사회적 삶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와 달리 사회 조직과 운영의 현실적 원리로 되는 그런 시대를 내다 보면서, 자신이 진짜 혁명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이렇게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 생활이 풍부해 지는 것은 이러한 진화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현실적 조건입니다.

생산력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생산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물질이 풍부해 지면 서로 침범하려고 다툴 필요가 없어집니다.

부족한 물자를 놓고 서로 양보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지금의 인간의식의 실태에서 보면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물질 문명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보편적 진보의 길이 아닙니다.

100년 전에 비교해 보면 인간이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들이 성숙했습니다.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서는 생산력, 민주주의의 보편적 확산, 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급속한 자유도(自由度)의 신장 등은 새로운 문명을 위해 대단히 유리한 조건들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는 진정한 자유나 행복이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으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 성공 여부는 지금의 여러 요소들을 새로운 문명 건설을 위해 어떻게 적절하게 쓸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자연을 침범할 필요가 없어지고, 침범하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어 못 견디는 사회로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백화난만(百花爛漫)한 화원처럼 꽃피게 될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것이며, 정신적 예술적 욕구가 커질 것입니다.


야마기시와의 만남


불교 사회연구소에서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연구를 함께 하면서 ‘이념과 구체적 삶의 괴리’를 넘어서야 하겠다는 욕구가 강렬해졌습니다.

이 때 마침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줄여서 특강)를 알게 돼서 7박 8일 간의 프로그램에 참가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고, 지금도 야마기시와의 만남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강 내내 그 동안 고민해 오던 여러 가지가 명쾌하게 풀리는 듯 했으며, 세월을 뛰어 넘어(야마기시는 1961년에 사망)이렇게  만날 수 있구나 하는 감격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때 생각했던 것을 간추려보면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의식이 진화해야할 (야마기시에서는 관념의 정상화라고 부르지만)목표가 , 즉 의식혁명의 목표가 선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아집(無我執) 무소유(無所有) 일체(一體)의 이념으로 집약되는데, 이것을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개인의 실례를 통해서 검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 닿았읍니다.

이 특별 강습연찬회를 보편화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보편화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둘째로 의사소통과 진리규명 방식으로 연찬(硏鑽)방식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연찬방식은 서로 상대를 향해 마주보는 토론이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 방식이 아니라 단정(斷定)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함께 규명해 가는 방식인데 ‘누가 옳은가’를 서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함께  물어가고 끝까지 규명해가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고, 이것을 보편화할 수 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한 단계 진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민주주의와 연찬방식이 결합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사회화한 실현지(實顯地)의 존재가 저에게는 미래 사회에 나타날 자본주의와 종교를 넘어선 ‘무소유 공용의 일체사회’가 꿈이 아닌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구체적 가능성으로 다가 왔습니다.

특히 그 실현지의 멤버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게 그 당시 이런 생각을 더 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이 단순히 관념계를 진보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조직과 운영원리로 되는 하나의 모델을 발견한 것이지요.


특강을 하고 나서 약 2년 동안 이런 생각들을 발전시켜 갔고 마침내는 자신이 그런 삶을 하기로 마음을 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족들과 의논을 해야 했고, 평소 저와 생각을 같이 하던 아내와는 합의했지만 아이들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은 좋아서 한다지만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것이 아닌가? 아이들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작은 공동체의 삶 속에 가둬버리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저희 부부가 가장 힘들었던 것도 아이들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좁은 공동체 안에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사회에서 그 가능성을 무한히 키워나갈 전망이 그려졌던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정말로 신념이 있다면 자식에게 당당하게 권할 수 있어야 그것이 진실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로서는 지금도 그런 판단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뒤에 이야기지만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나와 살고 있는 지금도 아이들이 그 생활을 후회하거나 고통스로운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지나치게 급진적인 사회 특히 교육에 대한 실험을 강요하지 않았나 하는 미안함은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특히 큰 아이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부천 고등학교에 합격한 아이를 시골 농고에 전학을 시키고 철저한 실학(주로 농업)위주의 야마기시 학원 고등부에 입학을 시켰는데, 주로 방학 때는 일본에 있는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학기 중에는 농고에서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것이 상당히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원체 착한 아이라 부모에게 불평 한마디 안했지만 ‘얼마나 힘 들었을까’생각하면 가슴이 짠합니다.

다음으로 결정을 어렵게 한 것은 제 안에 있던 민족 감정이었는데, 이성적으로는 넘어섰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구체적 현실로 되자 제 마음의 상태가 보여 왔고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는 계기를 삼자고 생각해서 참획(參劃)을 결정했읍니다.

야마기시가 일본 문화에서 탄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세계화 보편화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을 넘어서야 하고 그 이름도 처음에는 자연인의 이름이 더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진리 실천회 같은 것보다는 훨씬 겸허하지 않을까 생각) 앞으로는 적절한 이름으로 바꿔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8년 동안 실현지 생활을 하게 됩니다.


마을을 그리며


저에게 있어서 8년의 실현지 생활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좋은 생활이었습니다.

 연찬생활이라고 했지만 그 실태를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저를 잘 받아들여 준 실현지 식구들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다만 저로서는 일반 보편성의 추구라는 내면의 욕구가 강해서 실현지 중심의  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여러모로 검토한 끝에 결국 실현지를 나와서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실현지를 나오려고 결심하게 된 배경은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일반적 의식의 실태에 비해 사회의 짜임새가 대단히 높게 설정되어 있는데 따른 부작용입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집이나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짜임이 무소유로 되어 있으면 사람들의  소유욕이나 아집이 감소하는 쪽 보다도 오히려 허위의식이 나타나기 쉽게 되고, 억지로 맞추려고 하는데서 부자유가 나타나기 쉬운 것이 인간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둘째는 작은 소공동체를 하다보면 나타나기 쉬운 폐단입니다.

의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폐쇄성을 띄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선진적이라는 우월감에 빠지기 쉬어서 외부와의 교류나 받아들임에 소극적으로 되기 쉽지요. 더구나 한국에는 실현지가 하나 밖에 없어서 그 폐쇄성이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교류는 주로 일본 실현지와 하기 때문에 야마기시 밖의 세상과는 그다지 교류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됨)

셋째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 되겠지만 아이들 문제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새로운 사회에서 펴게 하겠다던 처음의 생각을 접어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는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부모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60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야마기시의 경험을 아주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야마기시가 그리는 미래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적인 실현지 중심의 운동보다는 보다 넓게 일반 보편적인 바탕에서 운동을 한다면 야마기시는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사상의 하나로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 어 가는데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일단 야마기시를 떠난 사람이고 그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인류의 고귀한 유산은 그대로 살려 가고 싶습니다.

야마기시 선생이 저술한 지적혁명사안(知的革命私案) 가운데 <인정사회조직으로 개조>라는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 쓰고 있는 ‘인정사회로 나가는 세가지 방법’ 같은 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행복회 홈페이지 allhappy.or.kr에서  연찬지(행복회 회지)에 쓴  <진보의 길>이라는 저의 칼럼 참조)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나름대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물론 야마기시 선생의 생각을 왜곡할 수도 있겠지만 그 허물은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타를 침범하지 않도록 그 한계를 정하고 그 선을 넘지 않을 것’

이것은 그 동안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해 온 대부분의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보의 표지(標識)로 되고 있는 것이지요.

사회 시스템과 규범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인류는 많은 진보를 이루어 왔고(야마기시 선생이 생전에 보지 못했던) 그 많은 부분이 투쟁을 통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투쟁이 분노나 증오가 바탕이 될 때 결국 타를 침범하게 되고 마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인류가 자각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시대의 과제로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싸움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미움이나 화에 휘둘리지 않고 싸우는 길’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보의 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읍니다. 

둘째는 ‘침범할 필요가 없도록 물자를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지금까지 진보가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산력은 그런 수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생태계 파괴나 자원고갈 , 물신 숭배 같은 문제 때문에 물질적 생산력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을 일반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높은 생산력은 진보의 또 다른 표지(標識)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원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고 있읍니다만 단순 소박한 삶은 저생산에 의해 강요된 ‘가난한 삶’이 아니라 욕구의 질이 변화해서 오는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셋째로 ‘타를 침범하는 것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달을 것’

특히 야마기시는 다른 두 안은 빠지더라도 이것 만은 빠트릴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의식혁명인데, 저는 21세기의 진보의 가장 중요한 표지(標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야마기시는 <폭을 넓히는 부끄러움을 깨닫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게 되는, 독점에 견딜수 없는 인간으로 서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야마기시 생전 보다 훨씬 그 바탕이 좋아진(첫째와 둘째 면에서) 지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

특히 의식혁명(세번째)을 주축으로 첫째의 사회변혁과 둘째의 물질 혁명을 함께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시대 정신이 아닐까 믿습니다.


저는 이런 바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끝에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데 미력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읍니다.(잡지 인드라망 연재 <남곡이 그리는 마을 이야기> 참조)


이상으로 저 자신의 사상의 편력이랄까 나름대로의 진리 실험에 대해 말씀드렸읍니다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원하는 바와는 다른 길들을 밟아 온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일반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수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하는 것과, 중도를 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극단적인 선택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을 밟아서 다행히 중도에 가까워졌으면 하고 위안을 삼아봅니다.


저는 또한 무수한 시련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온 이 땅, 특히 근대 이후 세계사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이 땅에서  인류 있는 한 영속할 새로운 문명, 진정한 중도의 문명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마을을 그리며

이남곡

요즘 나는 화성군 비봉에서 호박농사를 짓고 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권유가 마침 고마웠다.
단호박과 맷돌호박 3천주를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하고 있다.
친구도 초보농민이라서 아마 마을 분들이 따뜻하게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비닐하우스 안에 한달 이상 우리 묘판을 매일 관리해주신 친구의 대부님(카톨릭의)이나 트랙터로 밭을 만들어주신 앞 집 아저씨가 없었다면 시작부터 엄두가 안났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그 분들이 한창 바쁠 때는 같이 도와드리기도 하고, 친구가 양계(유정란)를 하고 있으니까 계분을 나눠드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받는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올 봄 서로 나누고 베풀면서, 우리는 항상 계산하고 손익을 따지는 삶 너머 우리 모두가 정말로 바라고 있는 인정(人情)을 느낀 것 같다.
얼마 전 친구와 둘이서 호박 순치기를 하고 있는데 앞집 아주머니께서 쟁반에 무엇을 담아 오셨다.
새참을 내 오신 것이다. 그 전날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하셨다며 소주 한 병하고 노지에서 재배한 딸기를 함께 내 오셨다.
처음에는 아침이니까 딱 술을 한 잔만 하자고 했는데 안주도 좋았지만 그 인정에 취해서 마시다 보니 한 병을 다 비웠다.
술도 알맞게 취하다 보니 호박순치기는 잠깐 제쳐 두고 밭두둑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우리가 그리고 만들려고 하는 마을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러나 항상 이렇게 유쾌한 기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애호박 한 상자(20개)를 600원(상자 값이 300원)에 팔아야하는 신씨 아저씨의 이야기나 잘 지은 알타리무를 그냥 로타리해야겠다는 앞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꾸려나가야 할 살림살이, 아이들의 학비, 영농자금에 대한 걱정들(사실 이것을 다 합치면 ꡐ돈ꡑ걱정)과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농업을 하려고 할 때 노동의 힘듬이 있다.
이 두 가지, 즉 돈 걱정과 노동의 힘듬이 해결되면 아마 사람들은 누구나 농업, 특히 유기농업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돈 걱정하지 않고, 일에 치이지 않고, 이웃과 따뜻한 인정을 나누며, 자연이 주는 은혜를 만끽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을까.
누구나 다 원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한다면 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돈 걱정 없이 살려면

ꡐ돈ꡑ걱정 없이 살려면 돈을 충분히 벌던가 아니면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극단적인 양자택일로 되기 쉬운데 그러면 어느 쪽도 진정한 행복의 길은 아니다.
ꡐ돈ꡑ만 풍족하면 행복하다거나, ꡐ마음ꡑ만 풍족하면 행복하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와 맞지 않는다.
ꡐ충분히ꡑ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아무리 벌고 벌어도 충분히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끝없는 부족감 속에서 산다.
ꡐ이웃과 함께ꡑ ꡐ자연과 함께ꡑ 자족할 수 있는 물질의 적정한 수준은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변할 때 새롭게 보여 온다.
또 한편 아무리 의식(意識)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보편적인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수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쾌적한 모습이 아니다.
ꡐ돈ꡑ과 ꡐ물질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하는 것은 지금의 시대에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나타내는 척도로 되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을 말한다면 돈에 대해서 적대적이어서도 안 되고, 돈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며, 돈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갈 본연(本然)의 모습을 포기하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대에 돈은 축복이며, 동시에 재앙으로도 되고 있다.
지금 시대에 돈은 사람의 에너지가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열심히 벌어서 자기 집을 장만하려는 젊고 가난한 부부의 소박한 꿈이 그 곳에 있다.
자식에게는 보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 그곳에 있다.
자본주의는 해방된 개인이 ꡐ자신의 생명력을 자신을 위해 쓰려고ꡑ 하는 지금 인류의 일반적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돈은 재앙으로 되고 있다.
최근에 카드 빚 때문에 빚어지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범죄의 대부분은 ꡐ돈ꡑ이 원인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존경받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파렴치한으로 전락하는 것도 ꡐ돈ꡑ 때문인 경우가 가장 많다.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 비리가 돈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아름답게 살아보려는 꿈이 좌절 되는 것도 돈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제 ꡐ돈ꡑ의 주술(呪術)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상당한 정도로 사회적 자유와 평등,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진 지금이야말로 ꡐ돈과 이기주의의 결합ꡑ이라는 주술(呪術)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원적 해법이 요구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진실한 진보주의자라면 ꡒ ꡐ물신(物神)과 이기(利己)의 늪ꡑ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ꡓ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신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의식 혁명이 사회 전체의 진보를 이끌어 가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실한 삶, 진실한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ꡐ상생과 조화ꡑ를 먼저 자신 안에서 실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나 국가 전체의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것이 시대에 안맞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ꡐ마을 만들기ꡑ가 횡적 네트워크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좋은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생각할 때 첫 번째로 그려지는 것은 돈의 유용성을 잘 활용하지만 돈이 아니라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이 우선하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꼭 필요한 물질적 수요에 궁핍하지 않으면서,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없을까.

나로서는 좋은 생산, 좋은 유통, 좋은 소비, 좋은 욕구 등에 관한 여러 가지 방도가 생각나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혜와 힘과 돈을 모아 연구하고 실천해 갔으면 좋겠다.

노동이 즐거움으로 되려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과학과 깨끗한 기술(기계화, 자동화, 약품의 개발을 포함), 노동관(勞動觀)의 변혁, 협업과 분업의 이점 등이 그것이다.
나는 여기서는 주로 협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일의 능률도 오르고 일이 재미있어진다.
능률이 오르니까 재미있어지고, 재미있어지니까 능률이 오른다.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쉽지 않다.
사람들은 협동의 이점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ꡐ동업ꡑ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동업을 해서 실패한 경험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은 너무 힘 든다. 농사를, 더구나 새로 귀농하는 사람들이 혼자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실패하지 않고 동업하는 길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동업이 힘든 원인을 잘 보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같이 일할 때 느끼는 부자유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일하는 방식이 자기하고 다를 때 느껴지는 부자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요즘 '호박 순치기'를 할 때 친구하고 나하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럴 때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 했을 때 그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뭔가 부자유감이 생긴다.
그런데 잘 보면 내가 자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생각은 그렇게 돌려보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말을 안 해 본다. 그래도 마음 속에 뭔가 부자유감이 있다.
이런 부자유감 없이 서로 소통할 수 없을까. 가장 좋은 방법을 서로가 부자유감 없이 찾을 수 없을까.
요즘 마음 공부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반들이 부자유감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시에 같이 일하는 현장이야말로 가장 좋은 마음 공부의 도량(道場)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쉽지는 않지만 요즘 하루 한 가지 씩 자기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ꡐ틀려 있을 수도 있다ꡑ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동업자(?)들이 함께 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무리하게 가깝게 하려하지 않고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 협동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에서가 아니라 지금의 사람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ꡐ거리ꡑ라는 말은 차가운 느낌이 나니까 ꡐ따뜻한 간격ꡑ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이 적절한 거리를 통해서 누구하고나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그 거리를 고정시키거나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것으로 자각하면 좋을 것 같다.
비봉 농장에 친구의 친척되시는 분이 함께 계시는데, 이 분은 언제나 혼자서 일하는 것을 즐기신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같이 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을 그릴 때 떠오르는 모습은 각자가 충분히 개인의 공간을 가지고 협동하는 모습인 것이다.
사람 사이의 거리도 사람들의 의식의 실태에 맞게, 서로 비난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쪽으로 변해 간다면 좋지 않을까.

우선 이 두 가지, 즉 마음의 부자유를 해소하려는 노력과 사람들 사이의 적정한 거리(따뜻한 간격)가 잘 조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 될 때, 함께 하는 삶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생활문화를 꽃피워 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

이상으로 내가 그리는 ꡐ좋은 마을ꡑ을 꿈꾸어 보았다.
혼자 꾸면 꿈에 그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ꡐ좋은 마을ꡑ은 도시의 아파트 촌이나 공장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농촌과 도시에서 이런 마을들의 네트워크가 광범하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신날까.
문득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농사가 짓고 싶어진 샐러리맨이 6개월이나 1년 직장에 휴가를 내고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가서 살 수 있는 곳.
도시의 불빛과 문화가 그리워진 농촌 청년이 한 1년 맘 놓고 도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도시 아이들에게는 방학이 기다려지는 고향 마을이고, 나이 들어서는 마음 놓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
농촌의 부모가 자녀를 마음 놓고 도시로 유학 보낼 수 있는 곳.
그 곳에 가면 어디나 내 집이 있는 이런 마을들의 네트워크.
이것이 내가 그려보는 인드라망이다.


좋은 욕구

 그 동안 집에서 농장까지 자동차로 다녔다.
그런데 농장을 가려면 국도에서 갈라져 약 3k 정도 차 한 대 정도만 다닐 수 있는 길을 올라가야 한다.
내가 출퇴근(?)하는 시간이 그 마을 사람들과 반대라서 처음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내 운전 경력이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일 서툰 것이 후진(後進)이라서 좁은 길에서 만났을 때 교행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기우(杞憂)였다.
군데 군데 교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서로 기다려주는 모습, 지나치면서 서로 손을 흔들어주거나 목례하는 모습들이 하루 일과를 상쾌하게 시작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행위를 하면 받는 쪽도 유쾌하지만, 하는 쪽은 더 유쾌한 것 같다.
더구나 올라갈 때, 같은 방향인 사람을 함께 태우고 가면 두 사람 다 뭔가 뿌듯하다.
나는 운전하는 사람에게 있어 길(道)이야말로 도(道)를 닦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를 하려고 할 때 자리를 내주면 즐거워진다.
좌회전하려고 기다리는 차를 위해 잠시 정지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일대가 밝은 에너지로 변한다.
물론 운전하다보면 얌체를 만나서 화가 나는 경우도 있고, 끼어들기 힘들어서 조바심 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은 급한데 도로가 정체될 때 짜증이 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야말로 진짜 도(道)를 깨칠(?) 때이다.
사람마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이 때야말로 화가 나지 않는 상태로 되는 가장 좋은 연습장인 것이다. 이것을 의식하고 하다 보면 ‘자기로부터’ 밝은 에너지가 나가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도로의 질서를 바꾸고 있다는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에 일체(一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전을 하다가 문득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운전을 잘 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살려줬구나’하는 깨달음이 쓱하고 다가웠던 경험이 있다.
전에는 길에 서 있는 교통경찰을 보면 웬지 마음이 섬칫했는데, ‘아! 저 사람이 나를 살려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 없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특유한 숭고본능(崇高本能)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내가 세상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좋은 마을은 좋은 욕구로부터

‘좋은 마을’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좋은 욕구’다.
욕구는 인간의 가장 심층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머리로 생각하는 표층의식이 아니라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動機)를 결정하는 의식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하고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경우에 잘 보면 숨기고 싶어하는 속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성(理性)으로 생각하는 의식의 변화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 실천이 잘 안된다’고 자책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엄격한 것이다.
머리로 생각을 내는 것만 해도 의식의 대단한 진화(進化)라고 생각한다.
불경(佛經)에도 마음을 내는데 2겁(怯) 그것을 체득(體得)하는데 3겁(怯)이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의식의 실태를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성적 사고’와 ‘심층의 욕구(또는 습(習)’의 괴리에 대해서 그렇게 괴로워 할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의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괴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이다.
어느 쪽으로 일치시키려고 하는가 하는 방향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옳은 길인가하는 판단이 서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오랫 동안 거쳐온 동물적(?) 본능에 지게 되면 ‘인격의 분열’로 괴로움을 겪게 된다.
나는 머리로 마음을 내서 점차 욕구 그 자체의 질이 변해가는 것이 사람의 의식이 진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그 과정이 순방향(順方向)으로 되면 건강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건강 한 것이다.
어떻든 좋은 마을을 생각할 때 나에게 시스템이나 물질적 조건보다 의식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내 자신의 성향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 동안의 인간의 역사나 자신이 경험해 온 세계를 통해 분명히 보여오는 것이 있다.
물질, 사회제도, 의식은 개인,사회, 인류가 진화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류를 진화시켜 왔지만, 그 상호작용의 양태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르다. 동시대인 경우에도 사회에 따라서는 크게 다른 것이다.
동시대, 같은 민족이라도 남북한이 크게 다르고, 한국사회 안에서도 농촌과 도시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절대빈곤과 전제나 독재 아래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먼저 개개인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적 물적 토대를 변혁하는 것이 1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행복한 사회는 오지 않는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화’라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화’를 인간중심적 가치 추구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깨트리는 원인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인간화’는 물신(物神)의 지배와 이기적 원자화(原子化)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과의 진정한 조화를 위해 자연의 한 구성요소인 인간으로서 준비해야 할 몫이 아닐까.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올바른 물질생활과 사회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물질이나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작용의 양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적어도 ‘좋은 마을’이라는 보다 진화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의식 특히 심층의 욕구가 진화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욕구’는 행복해 지기 위한 욕구

‘좋은 욕구’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추구에 순행(順行)하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되는 자유 욕구를 특히 말하고 싶다.
이 자유욕구야말로 인간이 이 지상에 출현해 온 이래 역사를 추동해 온 원동력이 아닐까.
자연의 제약이나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인류는 많은 성과들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자유가 발생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욕구는 작동한다.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발전시킨 물질문명이 자연 생태계와의 부조화를 발생시키면 이번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으게 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억제되거나,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커지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제도를 변화시켜 왔다.
그런데 이 두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뒤쳐진 부문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분야가 아닐까 한다.
지구 어디에서나 걸어다니면서 서로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게 된 인간이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인류의 현주소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이 마음의 부자유를 해결해야 한다. 물질적 생산력과 사회적 자유 평등이 상당히 진척된 그 동안의 역사적 축적이야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단히 좋은 환경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제 이 마음의 분야가 나아가지 않으면 현재 봉착하고 있는 자연과의 부조화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점점 더 적은 인원이 지구 전체의 수요를 넘어서는 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이미 그것이 시작되었고, 점점 가속화할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 즉 지구 한 쪽의 풍요와 다른 한쪽의 기아, IMF 사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세계적 범위에서의 대량실업, 부정과 부패, 약자(노인을 포함)들의 어려운 삶, 새로운 세계독재체제의 위험, 자연생태계의 파괴 등이 지금의 사회시스템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약육강식의 인간 이전의 자연 질서로 돌아가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후의 새로운 질서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와 소유의식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류존속의 조건으로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들어 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인류의 선각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밝혀 놓은 것이 있다. 다만 이런 자유에의 길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그 동안의 과정들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석가(釋迦)는 마음의 부자유를 탐진치(貪嗔痴)라고 너무나 명료하게 지적하셨다.
이러한 부자유를 인류가 보편적으로 넘어 설 수 있는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한다.
나는 21세기의 의식혁명은 인간의 자유욕구가 바로 이 마음의 3독으로부터 자유스럽고 싶어하는 욕구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화(怒)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또한 이 ‘나’가 고립되고 불변하는 실체라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얼마나 자유로운가!!
정말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런 사람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으로 되고 싶은 욕구, 나는 그것이 좋은 욕구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삶 속에 회향

인간의 자유욕구 가운데서 ‘마음의 자유’에 눈이 돌려지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흐름으로 존재하지만, 이것이 극단에 흘러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이것은 물질생활(자연과의 관계)과 사회시스템(사람과의 관계)에 회향될 때 비로소 진실하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사회적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마음의 변혁을 이루는 쉬운 길일 수 있는 것이다.
‘에고로부터 자유’를 관념 자체로 해결하는 것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에 의해서 훨씬 쉽게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좋은 마을’을 그려 볼 때 지금의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면 <시스템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마음이 나아가 시스템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 진화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순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마을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들 실태에서 보면 가족 단위의 개별경영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보다 더 나아간 경영형태를 취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말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다 사람의 냄새가 나는 마을, 산업사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이후의 마을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두가지를 제안해 보고 싶다.
하나는 ‘자유노동’의 실천이다.
말 그대로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노동이 마을의 생산력의 한 부분으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대가가 없어서 자유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행위자의 자유로운 의사인 것이다.
유형 무형의 부자유가 없는 상태가 아니면 섣불리 시작할 일이 아니다. 자유노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비난하거나, 그 양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자각이 있어야한다.
다음으로 마을에 ‘하나의 지갑’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가족은 각각의 지갑을 갖는다.
그 가운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하고 남는 것을 ‘마을의 지갑’에 넣는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의사이다. 유형 무형의 강제나 비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노동보다는 쉽게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행위자가 누구인지, 그 액수가 얼마인지를 모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나아가는 것 만큼, 마을의 생산력이 나아가는 것 만큼 이 지갑은 커질 것이다.
이 자유노동과 지갑이 커지는 것 만큼 자연스럽게 마을의 시스템이 변화되어 갈 것이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보다 쉽게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이지만 마을들의 네트워크가 하나의 국가 단위, 더 나아가 세계단위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자유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시키는 고도로 발전된 컴퓨터망의 유쾌한 움직임, 풍성한 ‘세계의 지갑’에서 물 흐르듯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는 물자의 흐름을.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것이다.


좋은 생산


피에르 뤼브롱은 이번 바캉스엔 저축을 다 털어서라도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
과거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시간 여행 전문 여행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 어느 시대로 떠나고 싶으세요?"
"루이 14세 시대요! 내가 늘 꿈꾸던 시대죠. 몰리에르나 라 퐁텐을 읽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우아하고 고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과 분수, 호화로운 실내 장식, 조각 등을 보고 싶어요. 여자의 호감을 얻는 기술도 배울 수 있겠지요? 당시 궁정에서는 그게 대단히 중요했으니까요. 아직 오염되지 않은 파리의 공기를 마시고 싶고, 진짜 토마토 맛이 나는 토마토를 먹고 싶어요. 살충제나 살균제는 구경조차 해보지 않은 채소와 과일을 먹고 싶고, 저온 살균 처리를 하지 않은 우유를 맛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저녁마다 텔레비젼에 넋을 팔고 있지 않은 시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잔치를 벌이고 이웃 간에 대화를 하고 남에게 관심을 갖는 시대를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사무실에 나가기 전에 각성제나 강장제 따위를 먹을 필요가 없는 남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는 시간 여행을 떠날 때 앉는 의자에 자리를 잡은 다음, 연도와 목적지를 확인하고 출발 버튼을 눌렀다.

파리, 1666년.
피에르의 오감을 가장 먼저 엄습해 온 것은 냄새다. 온 도시에서 지린내가 진동한다. 즉시 귀환 버튼을 눌러 그냥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숨을 조금씩 들이마시려고 애를 썼더니 그런대로 악취를 견딜만 하다.
두 번째 충격은 파리 떼다. 그는 제3세계 나라에서조차 그렇게 많은 파리를 본 적이 없다. 파리 떼가 그렇게 극성을 부리는 것은 인분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웬 여자가 집에서 청소를 하다가 쓰레기를 창문 밖으로 홱 던졌다. 피에르는 가까스로 그 쓰레기를 피했다. 원 세상에, 루이 14세 시대의 파리가 이렇게 더러울 줄이야!
쥐들이 도처에서 내달리고, 놓여먹이는 돼지들이 먹이를 찾느라고 주둥이로 이곳 저곳을 뒤지고 다닌다. 쥐와 돼지는 이 시대의 청소부다.
...........후략(後略)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바캉스>에서 일부 발췌

높은 생산력은 진보의 바탕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다.
기특(奇特)한 사람이나 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에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에게는 맞는 말이다.
자신의 의식주가 안정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그려 볼 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그 생산력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근원적인 것이 경제문제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제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희소성(稀少性)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화는 유한한데,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희소성에 대해 두 방향에서 도전해 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도 보여진다.
<재화를 충분히(물이나 공기처럼 무한에 가깝게) 생산할 수 없을까.>
<인간의 욕망의 질을 업그레이드시켜 궁극적으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실제로 이 두 가지 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길은 평탄한 대로(大路)가 아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희생, 수없이 많은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걸어 온 길이었다. 이 길이 험난했던 것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길(현상 세계의 변혁과 마음의 세계의 혁명이 서로 다른 길을 밟아왔다) 을 통해 진전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앞이 확 트인 큰 길이 보이는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그 길은 자본주의라는 분수령을 넘어서야 보이는 길이다.
이 분수령을 넘어서는 길에서 두 길은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역으로 하나로 통합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분수령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전에 비해 지금의 조건들은 엄청나게 진전되었다.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내 능력에 부치는 일이기도 하고 이 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몇가지 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총량 면에서 인류의 수요를 넘어서는 생산력, 사회적 자유나 평등에 대한 보편적 합의와 시스템의 발전, 관념계에 있어 신세대(新世代)의 높은 자유도(自由度)등은 10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새롭게 발생한 험난한 장애물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당면한 현실적 과제들이다.
생산력과 자연 생태계의 급증하는 모순, 한 쪽의 잉여와 다른 쪽의 기아가 존재하는 불평등(특히 국가간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삶 속에서 과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욕구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과는 반대방향)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문화, 그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왜곡된 자원배분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험난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고, 나갈 수 있다.
나는 그 길이 이미 도달한 성과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서는 생산력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건으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생산력은 여전히 좋은 생산의 가장 우선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농촌에서 좋은 마을을 꿈꿀 때 아마 가장 보편적인 바탕이 되는 생산은 유기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게 된 배경은 화학비료와 농약 등에 의한 농업혁명이 맬더스의 인구론(식량 생산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기농업이라고 해도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농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진전된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유기농업의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좀 역설적이지만 화학비료나 농약 등에 의해서 일반적 수요가 충족되고 있는 동안에!
결코 낮은 생산성과 낮은 소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일반 보편적인 방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름 내내 뙤약 볕에서 풀과 전쟁(?)하는 농민의 모습이 과연 아름다운 모습일까.
새벽 별을 보고, 달빛 속에 일을 해야 생활이 된다면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길은 아니라고 본다.
좋은 생산은 여전히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으로써 살리는 생산이다.
친환경 유기농업을 하자고 하는 것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생산은 일시적으로 높은 생산력을 나타낼지 몰라도 길게 보면 그것은 생산력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쾌적한 삶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연과 잘 조화되며,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높은 생산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마을에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기계화, 자동화와 결합된 유기순환농업

농업에서 '좋은 생산'이란 우선 두 가지가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땅을 살리고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순환 생산이다.
유기농업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 농업의 장래라고 보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유기농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순환농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축산법이 발전되어야 하며 이 축산과 작물 경작이 서로 순환되어야 한다.
이 순환의 단위나 범위는 한 농가 단위의 작은 범위로부터 보다 큰 단위 간의 광역순환까지 다양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
둘째는 사람을 살리는 생산이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하여 쾌적한 생산활동이 되도록 가능한 한 기계화, 자동화하고 무공해 약품을 적극적으로 개발 활용하는 것이다.
(가끔 유기농업을 지향하는 사람들 가운데 기계사용에 대해서 회의적인 경우가 있지만, 에너지 자원의 고갈이나 공해 발생과 같은 문제는 별도의 테마라고 생각한다.)
기계나 약품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수 십 배, 수 백 배 애를 쓰는 것은 결코 노동의 신성함도 사람을 살리는 길도 아닐 것이다.
유기농업에 대해서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에게 무리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그 목적하는 바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계를 쓰지 않고, 심지어 동물을 기르고 이용하는 것까지 삼가면서, 즐겁게 노동의 기쁨과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며 살아간다면 일반 보편적인 것과 관계없이 그 것은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모습으로는 퇴비 생산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기계화된 순환농업을 그려보자.
대규모의 농업 생산도 유기순환농업으로 할 수 있다는 전망이 생겨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관행 농업으로부터 일반 보편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려 하지만 우리가 농업이나 농촌의 생산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1차 산업으로서의 생산력을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요즘은 농축산 가공이 대기업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의 경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야가 농민에 의한 농산 가공 분야가 아닌가 한다.
다양한 입맛과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과 함께 농민의 마음이 들어 있는 농산 가공품이 새로운 유통시스템을 통해 도시인들의 식탁에 점점 더 넓혀져 가는 것을 그려볼 수 있다.
또한 농촌이 도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도록 농촌과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농촌에서의 가장 고도한 생산력으로 되는 것이다. 농촌이 도시인들의 휴양처 더 나아가 함양처((涵養處)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업주의가 우선되는 관광 농업이나 팬션 산업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이다.
나는 따뜻한 마음, 농심(農心)이 가장 고도의 생산력으로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시대에 농업과 농촌의 선구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의식에 부합하는 생산관계

다음으로 '좋은 생산'은 '좋은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유나 분배의 형태를 기준으로 경영시스템을 나눈다면 개별경영, 협동경영, 무소유경영 등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경영이나 국가경영은 생산 주체들의 동기나 의식에 따라 외적 형태가 유사하다 해도 내용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이윤동기가 지배적이면(자본가,노동자 공히) 기업경영이라 해도 본질상으로는 개별경영이 보다 효율적으로 확대된 모습인 것이다.
국가 경영이라 하더라도 그 국가의 성격이나 생산 주체들의 의식에 따라 봉건적 생산관계에서부터 무소유 경영에 가까운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인류의 발전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소유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무소유경영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바로 무소유 경영이 좋은 생산관계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일반적 의식에 부합되는 생산관계가 좋은 생산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국가 단위나 세계적인 단위로 보다 진보된 생산관계를 인위적으로 추구했지만 실패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심층의 의식에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생산관계를 바꿔서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는 사고 방식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식이 변화하는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있고, 그 변화 속도 또한 다른 현상의 변화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이다.
일시적이라도 성공한 사례들은 대체로 그 시대 사람들의 심층 의식이 욕구하는 것에 일치 했을 때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경영 형태가 더 우월한 것인가하고 따지는 것으로부터 어떤 경영형태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편하고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명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로 선택해야 한다.
나는 지금의 조건에서는 개별 경영이 사람들의 의식에 일반적으로 부합하는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 년 전 겨울 설악산에 갔다가 밤 사이에 큰 눈이 왔는데 다음 날 눈길이 위험한 곳마다 스노우체인을 파는 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란 참 편한 시스템이구나'하고 느꼈던 적이 있다.
의무나 감사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마음껏 자유롭게 쓰고 싶어 하는 지금의 일반적인 욕구와 잘 조화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농촌에서 좋은 마을을 그려볼 때 우선 가장 좋은 모델로 떠오르는 것은 협동경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은 이런 경영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선 내 자신의 실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개별경영이 바탕이 된 '좋은 이웃'의 관계이다.
이 좋은 이웃의 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이 바탕 위에 생산이나 유통에서 서로 협동해 가는 것이다. 품앗이나 공동출하, 공동구입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진척될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자유노동'과 '마을의 지갑 만들기'가 마음이 나아가는 것만큼 확대 될 것이다.
그 나아가는 것만큼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 오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개별경영이 오히려 불편하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될 것이며, 이 때 사람들은 협동경영이나 무소유경영 가운데 자신들이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으로 '좋은 생산력'과 '좋은 생산관계'를 추구한다면 어떤 종류의 무리(無理)나 강제(强制)도 없어야 할 것이다.



좋은 유통

진달래 마을의 예

진달래 마을 아침 8시
갑동씨는 마을 공용의 탑차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생산물들을 확인해서 싣고 있다.
일반 채소나 달걀은 개별 농가가 생산한 것이지만 햄, 소시지나 된장 같은 생산자협동조합이 만든 것도 있다.
오늘은 1주일에 한 번 인근의 광주 시에 있는 이 마을과 자매 결연을 맺은 개나리 아파트를 찾는 날이다.
한 시간 정도 물건을 실은 다음 9시에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광주를 향해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한다.
갑동씨는 갖 결혼한 35세의 청년으로 그 자신 양계(유정란)를 약 3000수 하면서 1주일에 한번 이 일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 닭은 호박 농사를 짓는 이웃의 을동이 아저씨가 보아 주기로 하고 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개나리 아파트에 도착하니 아파트 부녀회 회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한 시간 정도 반짝 장이 선다.  1주일에 한번 만나다 보니 한 가족 처럼 친근하다.
아파트 부녀회도 이 일이 시작되고 나서 훨씬 활기가 넘치고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도 탄력이 붙었다고 한다.
한 1년 째 하다보니 이제 거의 수요 공급이 맞는다. 쌀을 비롯해서 각종 야채와 달걀, 햄 소시지, 참기름 들기름, 된장, 고추장 등 일부 육류와 해산물을 빼고는 거의 오늘 장 보는 것으로 식탁이 차려진다.
처음에는 수요 공급이 안 맞아 애를 먹기도 했지만 근방에 장미 마을(해바라기 아파트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과 서로 교환하다 보니 양쪽 다 잘 맞아 들어 갔다.
진달래 마을과 개나리 아파트가 인연이 맺어진 것은 2년 전 유기순환농업마을로 알려진 이 마을에  아파트 부녀회에서 참관을 오면서부터이다.
주 5일제가 실시되고 나서부터는 엄마들의 손에 이끌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마을에 오는 빈도 수가 늘었고, 방학이면 아이들이 으례 외가집에 가듯이 마을에 가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기를 한 1년 하고 나서 오늘 같은 장이 서게 된 것이다.
갑동씨는 마침 오늘이 생일이라는 부녀회원의 초대를 받아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집에는  엄마들과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남편들이 마치 친정집 동생처럼 갑동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1주일 간 지낸 이야기, 여자들의 즐거운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두 시에 아파트를 나와 근처의 대형 수퍼 마켓에 들러 마을 사람들이 부탁한 물건들을 사고 나니 세 시가 조금 지났다.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 용남씨의 최근 히트곡이 담긴 음반을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집에 돌아 오니 네 시 반이 되었다.
양계장을 돌아보니 을동이 아저씨가 통로까지 깨끗이 쓸어 놓으셨다.
저녁을 먹고 8시에 마을 회관에 갔다.
결산을 하고 나서, 그 날 다녀온 이야기와 아파트 주민들이 전하는 인사들을 나누면서 밤늦게까지 이야기 꽃을 피운다.
마을 회관 한 쪽에는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는데,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지갑’이라고 부른다.
각자 집으로 돌아 가면서 이 주머니에 봉투를 넣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갑동씨의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학 면의 예

학 면 생산자 조합은  서울 서초구의 무등 생활협동조합과 하나의 생산, 소비, 유통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학 면 생산자 조합에는 5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학 면 전체 세대주의 60% 가량이다.
이 중에는 개별농도 있고 협동경영을 하는 영농조합들도 있다.
조합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업농이나 대농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해서 시장에서 대단한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고, 면 내의 학교나 의료 생협, 가구 공장에 직장을 갖고 있거나 공무원등 여러 가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면 생산자 조합은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을 유기농으로 생산하여 공급하거나, 이를 원료로  가공한 식품들을 도시의 식탁에  올리고 있는데 된장, 청국장과 장아찌류는 인기가 높다. 특히 무말랭이무침과 고추장아찌는 그 원료의 우수함과 만든 사람의 정성이 합쳐져 가히 예술품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가공 분야는 다품종 소량 생산의 이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생산자가 자기 이름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학면 생산자 조합의 조합원들은 유통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든 정성을 생산에 전념한다. 이것이 무등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들과 마음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1년에 두 번 같이 만나 축제를 하는데 특히 가을의 수확제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 때는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인근의 다른 면 사람들도 함께 즐긴다.)
그리고 못지 않게 마음 쓰는 것이 있다면 같은 생산자들끼리 어떻게 하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서로의 이익이나 의견의 다름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를 서로 마음을 다해 함께 탐구하고 실천한다. 특히 작물이나 가공품의 선정이라던가 품질에 대한 이견의 조정이 어려웠지만 조합의 시스템을 꾸준히 개선하고 조합의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서 상당한 정도 해결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전의 이익을 넘어설 수 있는 의식혁명이 중요하고, 시스템보다도 상생과 협동의 문화가 보다 근원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자체로 의식개혁의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자는 의견이 나와서 ‘일단 한 번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고 있다.
갑순 씨는 생산자 조합에서 무등 생활협동조합과 일상적인 연락 업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다.
여러 가지 상대 쪽의 제안(더러 항의도 있지만)을 받아서 그것을 이 쪽에 전달하고 그 결과를 알리는 일과 이 쪽의 제안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마을 참관이나 공동의 행사를 준비하는 일도 맡고 있다.
무등 쪽의 상대 역은 을순 씨가 맡고 있는데 같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자기 쪽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신들을 발견하면서 자신들이 왜 이 일에 뛰어 들었나 하는 반성이 누가 먼저랄 것이 없게 생겼다는 것이 이 도농 공동체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서로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보느라면 누가 어느 쪽의 실무자인가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시장을 넘어

농업에 관한 한 시장에 맡겨서만은 해결 할 수 없다.
이것은 시장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이후의 질서를 농업과 농촌 분야에서 먼저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농업 생산과 농민의 삶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난 번 W.T.O 회의에서 우리의 농민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던져 말하고저 했던 것도 결국은 그 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국제자유무역 질서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그 자유무역 질서에 역행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유시장 질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을지 모르고, 적어도 농업문제 만은 자유무역의 예외로 하자는 이야기는 지금의 국제질서 속에서는 현실성이 약해 보인다.
그러나 자유무역이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실이 있어야 한다.
만일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사회라면 경제적 약자에 속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국가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신념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특히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많이 보는 계층이 그 이익을 경제적 약자 그 중에서도 자유 무역에 의해 가장 피해를 보는 농민들에게 나눌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과 의식(意識)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농민들을 도시의 차디찬 아스팔트나 이름 모를 외국의 도시에 내몰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 안에서 여러 가지 방향의 자조 노력(국가, 농협, 농민 등)이 냉엄한 국제 환경에서 우리의 농업, 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류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시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즉  시장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시장의 틈새 속에서 시장을 넘어서는 질서가 얼마나 자랄 수 있느냐에 앞으로 우리 농업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시장 질서를 무시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시장을 넘어선다는 것은 결국 두 길을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시장에서의 경쟁력으로 살아 남아 번영하는 길과 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수입자유화의 물결은 시장 질서 안에서 우리 농업을 구조 조정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냉혹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력을 갖춘 대농이나 기업농이 출현할 것이다.
아마도 많은 농민들이 농업을 떠나게 될 것이다.(이미 고령화된 농촌의 일부는 농민들의 자연 수명과 함께 해체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자연 조건은 경쟁력을 갖춘 대농이나 기업농에 맡겨서만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단위의 중소농이 살아 남아서 번영하는 것이 우리의 경우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식량 안보(자주성)의 면에서도 환경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단위의 중소농이 살아 남으려면 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면 어려운 것이다.  
시장을 넘어서는 질서는 결국 사람들이 이윤동기를 넘어서는 의식의 뒷받침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가격법칙을 넘어서 농민이 도시인들의 식탁을 책임지고, 도시인들이 농민의 삶(재생산능력)을 보장하는 새로운 질서는 생산자인 농민, 소비자인 도시민이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농민의 의료, 교육, 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문제도 국민적 합의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들 의식이나 현실로 볼 때 상당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길 즉 농업에 관한 한 시장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질서가 시장과 공존하는 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시장에서 보면 가장 낙후한 골치꺼리(?)인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역(逆)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나타날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만 한다.
시장의 장점을 최대로 살리면서도 언젠가 가장 선진적인 질서로 무리 없이 인간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이 토지 만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토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까 하는 바램이 있다.
한국은 이미 토지의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시장경제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그러다보니 북쪽으로 시선이 간다.
지금의 수령절대주의와 같은 봉건적 독재체제가 민주화되는 것과 함께 그 이후 나타날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아마도 개인의 창발성과 에너지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시장경제로 전환되어야 하겠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국유(國有)의 원칙이 살려졌으면 한다.
토지가 투기와 축재의 온상으로 되지 않는 시장경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북쪽이 갖는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그런 바탕에서 북쪽에 나타날 새로운 마을 들이 그려진다.
서로 다른 사회 경제적 바탕에서 출발하지만 남북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를 향해 남북의 마을들이 서로 상생하고 조화되는 모습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

 

 

 

 

출처 : 좋은마을 사람들
글쓴이 : 복뎅이 원글보기
메모 : 이남곡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