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산행

[스크랩] 서민의 산 안성 서운산(瑞雲山;547.4m) 산행기

後凋1 2010. 3. 17. 22:16

                   서민의 산 안성 서운산(瑞雲山;547.4m) 산행기


  서민의 고장인 안성에 서민의 산이 있다. 모나게 암릉이 괴롭히지도 않고, 빼어나서 도도하지도 않으며, 높아서 거창하지도 않은, 작고 볼품없는 산이지마는 인정이 넘치는 유순한 산, 바로 서운산이 안성에 있다.

  ‘안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무엇이든지 주문만 하면 그에 맞게 잘 만들어내는 ‘안성맞춤’인 생활유기가 너무 유명하여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도 통하게 된 그 고장에 서민의 산 서운산이 있는 것이다. 

                                              서운산

 

  그리고 안성에는 안성평야와 죽산들판 등의 기름진 땅과 안성천, 죽산천 등의 풍부한 물줄기가 있어서 우수한 품질의 쌀과 알이 굵고 맛이 좋은 포도를 생산하고 있으며, ‘안성 배’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살기 좋은 고장이어서 고을 이름 자체도 편안한 안(安), 도읍 성(城), 안성이라 하게 된 듯하며, 이래서 가난한 천민들이 빌붙어 살기가 좋아서 조선 후기 안성에 10여 개의 남사당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에서 주인공 허생이 변 부자에게 10만 냥을 빌려 안성에 내려와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제수용 과실들을 모두 매점매석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안성은 예로부터 교통이 발달하여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고 했을 만큼 전국 각지의 물산이 모여들었으며, 안성 5일장은 대구, 전주와 함께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고장엔 늘 그에 따른 고민도 있는 법, 권세가들의 가렴주구 약탈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조선의 3대 대도(大盜)라 일컬어지는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등이 또한 안성에 출몰한 적이 있으며, 교통의 요지라서 전쟁의 고통 역시 잦았다.

 

  이곳이 지금은 경기도와 충청남북도가 갈라지는 삼도의 경계이지만 예전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 접경지대였다. 남진정책을 감행한 고구려의 최남단 전선이었고, 백제의 동쪽 경계이기도 하며, 신라의 북쪽과 서쪽의 경계이기도 하여 이곳이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선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등 외환이 밀어닥쳤다.

  그런 내우외환이 닥칠 때마다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서민들이었고, 그런 서민의 고통을 달래줄 신앙의 대상이 미륵불로 나타났다. 그래서 안성은 미륵불의 고장이다. 아마 전국을 통틀어서 안성만큼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던 곳도 없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미륵불이 하생(下生)해 있어서 그야말로 안성은 미륵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성 아양동 미륵

 

  신라의 천년 왕도 경주가 공식문화를 대표하는 불국토(佛國土)라 한다면 안성은 남사당패와 미륵불이 어우러져 용화세계를 꿈꾸는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불국토라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서운산은 서민의 산답게 산세가 부드럽고 그다지 높지 않아서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더구나 산기슭에 청룡저수지, 마둔저수지 등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품 안에는 호젓한 석남사, 청룡사, 좌성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이 있으며, 정상에서는 드넓은 안성 들판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등 볼거리도 많아 수도권의 당일 산행지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서운산이 해발 547.4m에 불과한 노년기의 산이지만, 이름 그대로 퍽 상서로운 산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조에 “비를 빌어 응답이 있는 상서로운 산”이라 소개돼 있다고 한다. 

 

  산줄기로는 서운산이 금북정맥 마루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13정맥 중의 하나인 한남금북정맥이 속리산 천황봉(1,057.7m)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데, 이 한남금북정맥이 북으로 달려와서 칠장산에 이르러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이후 한남정맥은 계속 북으로 치달아 김포의 문수산(376m)까지 이어진 후 한강 하류에 그 여맥을 가라앉히고, 금북정맥은 칠현산(516.2m)과 덕성산(519m)을 지난 후 옥정현과 배티고개를 지나 서운산에 이른 후 충청도 지방으로 달려간다.

 

  서운산을 오르는 들머리는 크게 두 곳, 즉 남쪽 청룡사 방면과 북쪽 석남사 방면으로 갈라지지만 청룡사 쪽이 볼거리가 많아 처음 가는 사람은 청룡사를 들머리로 하는 것이 정석이다.

  안성시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청룡사로 가려면 수도권에서 접근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안성 IC를 이용하거나 중부고속도로 일죽 IC, 혹은 진천 IC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으나 어느 쪽을 택하든 마지막엔 34번 국도로 진입해야 한다. 

                                             청룡저수지

 

  그리하여 34번 국도변 서운면 청룡리의 청룡저수지 부근에 이른 후, 34번 국도를 벗어나서 북쪽으로 청룡저수지 둑길로 접어들어 청룡저수지를 오른편에 끼고 1.2km 정도 북진하여 서운산 아래로 들어가면 청룡사 버스종점에 이르고, 버스종점 오른편 다리 건너엔 널따란 청룡사 주차장이 있다.  

 

  그리고 버스종점 정류소에서 50여m 올라가면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고목들 아래에 청룡사 사적비가 있고, 거기서 길이 갈라진다. 오른편 다리 건너 길섶에는 청룡사 부도밭이 있고, 그 앞을 지나 계속 불당골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 유일의 남사당패 여자 꼭두쇠였던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

 

  그리고 청룡사 사적비를 지나 직진하는 길로 100여m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청룡사 작은 주차장이 있고, 오른편 다리 건너가 청룡사이다. 평일엔 거기 작은 주차장까지 차를 가져가도 된다.

  청룡사와 바우덕이 사당은 산행 후에 들려보기로 하고, 청룡사 앞 작은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포장길을 따라 산행에 들어간다. 

 

  삼월 날씨로는 드물게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서 잔뜩 눈이 쌓여 원래 걸음이 느린 터에 푹푹 파이는 눈길을 걸으려니 힘도 들고, 가뜩이나 느린 걸음이 더 늘어져 2시간 조금 더 걸리면 산행을 마친다는 산행길이 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서운산이 안성, 진천, 천안 등 도회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산행 코스도 많고 샛길도 많은데, 눈이 많이 와서 러셀 된 곳만 길이 열리므로 아주 단순한 코스가 되어 헤맬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청룡사 앞의 작은 주차장에서 개울 왼편을 끼고 북쪽 골짜기를 향해 5분 정도 올라가면 개울 오른편을 끼고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거기 길가에 좌성사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서있다.

  그리고 2~3분 올라가면 좌성사로 가는 길과 은적암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거기 이정표에 은적암을 알리는 표시는 없고, 은적암 쪽을 가리키며 ‘정상 2.0km’라 적혀 있고, ‘좌성사 2.2km, 청룡사 0.7km’라 적혀 있다.  

 

  은적암으로 가는 길이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는 지름길이지만 초행이라서 서운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좌성사로 가는 왼쪽 길을 택했다. 고개 너머 좌성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차도 수준의 길이어서 비록 비포장 길이기는 하나 길이 넓고 편안해서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산행을 하기에 좋을 것 같다.

 

  눈길을 헤치며 청룡사에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주능선 상의 안부에 이른다. 보통 40여분 걸린다는 곳을 1시간 걸려 올라갔다. 능선에만 올라서도 안성 쪽의 들판과 시가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능선 안부에서 다시 5~6분 진행하면 오른편 산 중턱에 좌성사가 있다. 그러니 청룡사에서 바라보면 산 너머에 좌성사가 있는 셈이다. 

 

  좌성사는 옛날 복천암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지금의 절은 백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비교적 근래의 절이다.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만 있는 작은 절로서 옛날 ‘복천암 터’라는 말이 뜻하듯이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하지만 대웅전 뒤편의 약수터가 눈에 덮여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대웅전 뒤 삼성각과 요사채 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지며, 3~4분 올라가면 새로 지은 듯한  ‘서운정(瑞雲亭)'이라는 팔각정자가 있고, 팔각정자에는 안성 출신의 시인묵객들이 서운산을 예찬한 시와 글씨가 여럿 걸려 있다.

  그 옆엔 석조여래입상(경기도 향토유적 제43호)이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가 서운산성이다. 서운산성은 토축산성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에 6~8m 높이로 둘레가 620m에 달한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때 이 고장에서 의병을 일으킨 홍계남(洪季男) 장군이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수축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원래 토성이라 산성의 형태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서운산성 앞 갈림길에서 왼쪽 가파른 길을 7~8분 올라가면 탕흉대(盪胸臺)가 나온다. 서봉(543m) 아래 서쪽 끝에 돈대처럼 생긴 바위 턱으로, 씻을 탕(盪), 가슴 흉(胸), 그래서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대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안성과 평택, 성환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천연전망대이다.    

  실상 서운산은 정상 부근보다는 송림에 둘러싸인 탕흉대가 더 아늑하고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탕흉대에서 서운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온통 소나무 숲이어서 풍광이 아름다운데, 겨울철 낙엽이 지고 소나무 잎만 남은 상태에서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소나무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다.

  그렇긴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더러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부러지고 어떤 나무는 통째로 쓰러진 것도 있어서 안쓰럽다.   

 

  그리하여 탕흉대에서 35분 정도 서봉을 지나 서서히 한 차례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은 남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서 청룡사 아래 계곡 전체와 청룡저수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헬기장에서 5분이면 큰 바위가 있는 서운산 정상에 닿는다. 경기도 최남단의 산이라는 해발 547.4m의 서운산 정상엔 산 이름은 새겨져 있지 않고, 산 높이만 새겨진 특이한 정상표지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 바위에 올라 북쪽 들판과 산간 저수지들을 바라보는 맛이 각별하다.

 

  정상에 머물다가 되돌아 나와서 헬기장을 지나고, 금북정맥 능선인 엽돈재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이르면 거기 이정표엔 ‘엽돈재 5.3km, 정상 0.2km, 청룡사 2.4km’라 적혀 있다. 그리고 은적암 갈림길에서 은적암으로 내려오는 길은 꽤 가파르다. 

  그리하여 정상에서 30여분이면 은적암에 닿으며, 은적암은 여염집처럼 생긴 아주 초라한 절이라서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은적암 

 

  그리고 은적암부터는 계곡 길이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30여분이면 청룡사에 닿으면서 산행을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산행거리 약 7km, 산행시간은 평소에 2시간 30분, 쉬는 시간 포함하면 3시간이면 된다지만 눈길이라 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남은 시간이 많아 청룡사를 둘러보고, 바우덕이 흔적도 찾아본 후 안성의 미륵불을 뵈러 다닌다면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청룡사>

 

  청룡사 앞 작은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瑞雲山靑龍寺(서운산 청룡사)’라는 현판을 단 문간채에 들어서니 다른 절과 달리 사천왕상은 보이지 않고, 정면에 고풍스런 대웅전부터 시야에 들어온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했다.

  그 후 공민왕 13년(1364년)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에서 절 이름이 유래한다.

 

  청룡사를 중창했다는 나옹 혜근(慧勤)은 1320년에 태어났고, 속성은 이씨이며, 영해 사람이고, 20세 때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출가했다고 한다.

  이후 득도하여 고려의 마지막 고승이라 일컬어졌으며,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여, 공민왕의 초청으로 성중에서 법을 설하고, 후일 금강산 정양암, 춘천 청평사, 오대산 월정사 등을 거쳐 양주 회암사에 있다가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1376년 입적하였으며,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선시가 전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이후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청룡사는 역대 왕들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던 명찰이었지만 지금은 조촐한 절로 남아있다.

 

  보물 제824호인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중기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웅전 기둥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서민풍의 건축물이어서 안성이라는 지역, 서운산이라는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서민문화의 진수를 보는듯하다.

  제멋대로 뒤틀린 괴목에 가까운 기둥을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 그대로 세운 꾸밈이 없는 소박한 건축물이다. 마치 굽으면 굽은 대로, 꼿꼿하면 꼿꼿한 대로 세상에는 다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는 법이라는 대자대비 부처님의 뜻을 따르듯 하다.

  물론 대웅전을 고쳐 지을 당시 목재가 부족하여 그랬겠지만 이런 비정형의 상식을 파괴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목수는 도대체 누구였는지, 이런 건축양식은 자연주의 미학에서 울어 나온 것인지, 아니면 궁여지책이었는지, 아무튼 그의 기발한 착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산 개심사(開心寺)에도 이런 기둥이 있다지만 종루와 요사건물 일부가 그럴 뿐 대웅전을 이렇게 지은 곳은 이곳 청룡사밖에 없다.

  대웅전 앞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조그마한 삼층석탑이 있어 이 역시 서민적인 고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었던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기도 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청룡남사당패의 근거지였고, 서민문화의 온상이었다.

 

  그래서 청룡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무대이기도 하다. 광대 출신 화적 장길산은 이곳 청룡사에서 운부 스님으로부터 “미륵의 세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대웅전 안쪽엔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동종(보물 제11-4호)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조선 효종 9년(1658년)에 승려 화가 명옥(明玉)이 그린 청룡사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57호)을 비롯하여 청룡사감로탱(보물 제1302호)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청룡사영산회괘불탱(보물제1257호)

 

  특히 그 중에서도 보물 제11-4호 동종(銅鍾)은 신라종의 전통 양식을 따른 종으로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音筒)과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鍾身)을 갖췄으며, 역동적인 용뉴(龍紐)와 보살상, 그리고 하대에 표현된 연화당초문의 정교함 등으로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표현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물제11-4호 동종

 

  이는 조선 숙종 무렵(18세기)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비구 승려인 사인(思印)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으로, 사인 비구는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삼국시대 신라의 사원 세습으로 내려오던 승장(僧匠)의 맥을 이은 마지막 장인이었다고 하며, 그는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어 불교의 공예미를 드러낸 명장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 제11-2호), 홍천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 등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나타내며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안성 청룡사 동종’이다.

 

  절간을 나오려는데 문 옆에 층층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속이 썩은 고목이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층층나무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층층나무는 원래 탑을 연상케 하는 나무라서 절과 인연이 있는 듯한데, 서민적인 절의 연륜과 썩 잘 어울린다.


<바우덕이>

 

  청룡사를 둘러보고, 청룡사 사적비가 있는 곳으로 나가서 왼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길 왼편 언덕에 청룡사 부도밭이 있고, 그 앞을 지나 개울을 따라 500여m 걸어 들어가면 왼편 언덕 위에 바우덕이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 청룡남사당패의 본거지였으며, 바우덕이라는 여인이 기예를 익혔고, 그 바우덕이가 마지막 생을 마감한 청룡리 불당골에 남사당패 유일의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의 넋을 기리고자 2005년 9월에 건립한 사당이라고 한다.

 

  사당 앞뜰에는 안성이 유기의 고장답게 유기로 조성한 바우덕이 동상이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기라서 전국의 사찰들이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문란이 극에 달했고, 이에 따른 지방 수령들의 수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사찰과 사하촌(寺下村)은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가 많았다. 청룡사 역시 청룡사가 위치한 지역 이름을 ‘불당골’이라 할 만큼 청룡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사하촌과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남사당패 역시 불당골을 근거로 청룡사와 서로 도우는 특수한 공생관계에 있었다. 청룡사는 남사당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남사당패는 공연을 하면서 먹거리와 현금을 조달하기도 하고, 스님들이 만들어준 부적을 팔아 사찰불사에 보태기도 하는 등 공생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노숙이 불가하고 놀이가 어려운 겨울철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아예 청룡사 경내에 머물면서 끼니를 해결하다가 봄이 되면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信標;오늘날의 증명서)를 챙겨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조선 후기 생활이 피폐해진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놀이 집단인 남사당(男寺黨)은 원래 독신 남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남사당과 비슷한 연희집단(宴戱集團)인 사당패, 걸립패 등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사당패(寺黨牌)는 남녀 혼성이었고, 걸립패(乞粒牌)는 동네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악을 울려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기 위해 조직한 단체를 말한다.

 

  남사당패는 단원이 대개 50~6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원은 스스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가출한 아이 등으로 충당하였으며,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비롯하여, 그 밑에 곰뱅이,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의 서열이 엄격했다. 

  곰뱅이는 마을에서 놀이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하거나 먹을 것을 책임지고, 돈을 관리하면서 꼭두쇠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뜬쇠는 각 연희분야의 우두머리로 14명 안팎이 있었으며, 가열은 실제 연희자(宴戱者)를 말하고, 삐리는 주로 여장(女裝)을 하여 잔심부름을 하면서 가열이 되기까지 수련을 쌓는 자들이다. 그밖에 늙어서 연희를 못하고 뒷일을 돕는 저승패와 짐꾼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바우덕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이면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백여 년 전 안성에는 개다리패, 심선옥패, 오명선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원육덕패 같은 남사당패들이 있었으나 바우덕이패가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1848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의 애비는 가난한 홀아비 머슴이었다. 그런데 그 애비가 병에 걸려 앓아누워 죽음에 이르게 되자 당시 다섯 살 어린나이이던 바우덕이를 남사당패에 맡겼다.

 

  원래 이름이 김암덕(金岩德)이었기에 ‘岩’자를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리게 되고, 바우덕이는 마당에 줄을 그어 줄타기를 배우기 시작하여, 사내아이들 틈에 끼여 어름(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는 줄타기) 외에 새미(舞童)와 소리, 풍물(농악), 버나(가죽 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멍석 위에서 공연) 등 갖가지 기예를 배워나갔다.

  날렵한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예는 사내아이들을 능가했고, 그녀의 기예는 해가 갈수록 출중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기예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기예를 구경하는 사람 모두 신들린 듯 나풀거리며 줄을 타는 바우덕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처럼 바우덕이는 남사당놀이의 모든 기예에 뛰어난 소질을 발휘하여 일곱 살 되던 해부터는 당당히 제구실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사당패와 함께 공연을 나가면 바우덕이는 관람객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받았고, 이래서 바우덕이가 속한 남사당패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늘어나는 등 남사당패 내부에서 바우덕이의 존재 가치는 더욱 커갔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고, 그녀의 뛰어난 기량으로 인하여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행가처럼 바우덕이를 칭송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그러다가 바우덕이가 15세가 되었을 때 청룡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 윤치덕(일명 개다리)이 죽자 새 꼭두쇠를 정하게 됐다. 이때 남사당패 전통에 유례가 없는 여자 꼭두쇠가 탄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우덕이의 인기를 이용하여 그를 앞장세움으로써 득을 볼 수 있다는 노련한 뜬쇠들의 뜻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나이가 15세밖에 안되었고, 더군다나 여자의 신분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우덕이의 뛰어난 예술적 소질과 공연장에서의 스타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렇게 하여 꼭두쇠가 된 바우덕이는 이름만의 꼭두쇠가 아니었다. 60여 명이나 되는 행중(단원)을 거느린 꼭두쇠 바우덕이는 남자만의 세계인 남사당패에 하나뿐인 어린여자였으나 그는 뭇 사내들을 휘어잡았다.    

  바우덕이가 꼭두쇠가 되자 사내 꼭두쇠가 이끌 때보다 잠자리도 편안하게 얻어냈으며, 놀 자리(연희장소)를 곰뱅이트는데(공연 허가를 얻어낸다는 남사당의 은어)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러다가 고종2년(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면서 지친 노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각처의 연희집단을 불러들여 공연을 시켰다. 거기서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최고의 공연을 펼쳐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할 정도로 바우덕이의 연희는 노역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감사의 표시로 바우덕이가 이끈 남사당패에게 정3품 당상관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玉貫子)를 내려 그들의 영기(令旗)에 걸어줬다. 당시로서는 유랑 천민집단에게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정3품 당산관 옥관자를 받은 바우덕이 남사당패가 그 깃발을 앞세우고 지나가면 전국의 모든 놀이패들이 길을 터주며 절을 드렸고, 이때부터 바우덕이 남사당패는 전국 남사당패와 모든 놀이패의 최고 우두머리 단체로 활동하게 됐으며,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바우덕이패가 왔다, 바우덕이다”와 같이 그 패거리의 명칭이 점차 ‘바우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됨으로써 노비보다 비천한 신분과 남존여비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바우덕이라는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인 스타가 탄생한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대중문화 기원을 이때부터라 보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연예인이자 대중문화 스타를 ‘바우덕이’라고 평가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효시’를 예전에는 주로 서구문화로부터 그 원류를 찾으려 했으나 요즘엔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이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예술을 통해서 발전해온 결과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에는 항상 조선 후기 남사당패가 자리 잡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그 남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를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최초의 연예인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우덕이는 당연히 뭇 사내들의 사모의 대상이 됐다. 더구나 남자들만의 집단인 남사당패인지라 여자로서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당시 바우덕이를 기리던 타령이 오늘날까지도 일부 남아 있다.


덕아 덕아 바우덕아

바람에 손목 잡혀 이 세상에 왔느냐

길 따라가도 편히 못가는 인생

어찌하여 너는 외줄을 타려 하느냐

청룡사 푸른 하늘 멍텅구리 구름같이 갈 곳 없어도

남사당이 좋아 바람 부는 청춘아


덕아 덕아 바우덕아

신명에 몸이 끌려 저 산 넘어 왔느냐

밤이슬 맞으며 천대 구박 받아도

어찌하여 너는 외줄을 타려 하느냐

비봉산 깊은 골짝 싸늘한 얼음같이 갈 곳 없어도

꼭두쇠가 좋아 떠나가는 청춘아

 


  그렇게 눈부신 바우덕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패거리에서 서른 살이나 손위이며 뜬쇠인 이경화(李敬和)가 바로 그이였다. 다른 젊고 재능이 뛰어난 남자들 틈에서 드러내놓고 바우덕이를 사랑할 수 없었으나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그녀의 휘하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바우덕이는 이후로도 전국을 다니며, 남사당이라는 천한 놀이문화를 대중공연문화로 발전시켜 백성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 내리고 위로하는 활동을 지속하다가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그만 폐병을 얻었다.

 

  꼭두쇠인 그녀가 병을 얻었다는 것은 곧 행중(무리)을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한때는 그녀의 미소라도 얻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던 뭇 남성들조차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바우덕이는 행중을 떠나 병든 몸을 끌고 청룡사 밑의 불당골을 찾아들었다.

  그러한 그녀를 지켜준 사람이 바로 이경화였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병들고 외로운 그녀 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병수발을 하고, 동냥을 하여 끼니를 잇게 한 것은 그의 마음에 있는 절실한 사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지피를 쏟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바우덕이, 떠가는 흰 구름을 보며 어디론가 가고 있을 패거리를 그리는 바우덕이의 나날을 이경화는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미인은 박명이라 하든가, 18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바우덕이가 숨을 거두자, 이경화는 생전의 기구했던 팔자를 씻어버리라며, 그녀의 주검을 일부러 개울가에 묻었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죽은 후 남사당패도 흩어지니 청룡리는 쓸쓸해지고, 그녀의 무덤을 돌보는 사람도 없었다. 3년 뒤, 가슴에 묻은 사랑을 찾아 다시 찾아온 이경화가 무덤 앞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 간 후, 그 역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안성 최고의 전통놀이인 남사당 풍물놀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에 ‘남사당 풍물놀이 전수관’이 조성됐으며, 전수관 앞마당에는 황토를 다져 야외무대를 갖추고, ‘아트센터 마노’와 한 곳에 있어 문화의 다양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됐다.

  그리고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에서는 남사당 전수관 개관을 기념하여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6시 30분에 남사당 전수관 공연장에서 무료 상설공연을 갖고, 해마다 가을이면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향토유적 제38호 지정됐으니 바우덕이는 비록 지하에서나마 불우했던 과거를 잊고 웃고 있을 듯하다.


  바우덕이 사당을 둘러보고, 바우덕이 무덤으로 가려면 바우덕이 사당과 바우덕이 무덤은 3~4km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지 걸어갈 곳이 못 된다.

  청룡사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되돌아 34번 국도로 나와서 우회전하여 1km 정도 천안 방면으로 전진하면 오른편 길가에 바우덕이 무덤 있는 곳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 있다.

 

  거기서 우회전하여 다시 500여m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바우덕이 무덤까지 찻길이 이어져 있고, 중간에 퇴비공장, 석재공장, 건축자재 보관소 등이 있어서 아주 어수선하므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낫다.

  바우덕이 무덤은 개울 가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있어서 초라하지는 않으나 진입로가 어수선하여 영 맘에 안 든다.

 

  비록 불우한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무덤은 잘 단장이 돼 있어서 찾는 이의 마음을 달래준다. 타고난 미색과 총기로 남사당패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던 그녀의 불꽃같은 삶을 떠올리며, 그녀의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렸다.


<안성의 미륵과 죽주산성>

  서운산 산행도 마치고, 청룡사와 바우덕이 흔적도 둘러본 후, 느긋한 심정으로 57번 도로를 따라 안성으로 나와 38번 국도를 만나면 우회전하여 중부고속도로 일죽IC 쪽을 향해야 한다.  

  안성의 미륵불을 비롯한 석탑과 죽주산성 등의 유적들이 주로 삼죽면과 죽산면에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안성에서 일죽IC 쪽으로 향하는 38번 국도에 들어서서 4km 정도 진행하면 왼편으로 길이 갈라지는 길목에 ‘쌍미륵사’, ‘이경순 소리박물관’, ‘DIMA종합촬영소’ 등의 간판이 요란한 곳에 이른다.

  거기서 좌회전하여 큰 고개를 넘어 4km 정도 들어가면 오른편에 쌍미륵사와 국사암 들어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길목의 이정표에 ‘쌍미륵사 1.2km, 국사암 2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쌍미륵이 있는 쌍미륵사까지는 그런대로 승용차 교행이 가능한 길이 이어지므로 진행에 지장이 없다.

 

  ‘기솔리 쌍미륵(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이 있는 곳에는 쌍미륵을 기리는 ‘쌍미륵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어서 미륵불을 지키고 있다.

  국사봉 아래 기솔리를 굽어보고 서 있는 쌍미륵은 크기와 모양이 거의 비슷하며, 높이는 5.7m 정도 되고, 머리에 자연석을 둥글게 가공한 갓을 쓰고 있다. 얼굴은 살이 통통한 방형이고, 퍽 서민적인데, 마을 사람들은 바라보아서 오른쪽에 있는 미륵이 체구가 약간 굵고 커서 남미륵불이라 하며, 왼쪽에 위치한 날씬한 불상을 여미륵불이라 부른다.

                                                국사암

 

  그런데 쌍미륵을 둘러보고 3~400m 되돌아 내려가면 왼편으로 ‘궁예미륵’이 있는 국사암 가는 길이 갈라지며, 국사암까지는 차량 교행이 불가능한 일차선 좁고 아주 가파른 시멘트포장도로가 7~800여m 이어지므로 운전에 주의를 요한다.  

  국사봉 중턱에는 국사암 전각들이 바위 틈새를 비집고 앉아 있다. 작은 절이긴 하지만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으며, 법당(극락전) 오른쪽 옆에 공식명칭이 ‘국사암 석조여래 입상(향토유적 제42호)’인 3기의 아담한 미륵이 있다.

 

  중앙 불을 일명 ‘궁예미륵’이라 하며, 좌(서) 불은 문관, 우(동) 불은 무관을 각각 상징하도록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고,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2m이며, 삼존불 모두 둥근 보개를 쓰고 있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중앙 불의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고 있으며, 좌 협시는 약병을 들고 있고, 우 협시는 석장(승려 지팡이)을 짚고 있다.

  그런데 이 삼존불은 미륵이라기보다 문인석에 가까운 석인상을 닮았으며, 손 모양도 수인이 아니라 선비들이 합장을 하고 있듯 한 모습이다. 보개도 몸체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거대하고, 목이 지나치게 짧은 조각수법이나 형태를 보아 조선후기나 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서 궁예시대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신라 하대에 죽산지방에서 기훤(箕萱)이 봉기했을 때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七長寺)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궁예가 찾아갔으나 기훤은 푸대접을 하였다. 이에 궁예는 기훤을 등지고 북원의 양길(梁吉)을 찾아간다.

  이후 후고구려를 창건한 궁예는 죽주지방까지 손에 넣었고,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후대에 궁예를 기리는 이 지방의 누군가가 이 미륵을 조성한 것 같으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고, 다만 궁예와 인연은 있는 미륵임에 틀림이 없다.

  쌍미륵과 궁예미륵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서 다시 38번 국도를 따라 일죽IC 방향으로 10여km 진행하면 죽산면 소재지 마을에 이른다. 거기서 죽산면 소재지 마을에 일단 들리면 그 마을 동쪽 끝자락에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있다.  

 

  그리고 그 부근이 고려 초기에 봉업사(奉業寺)라는 대찰이 있었던 곳이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1966년 경지정리 작업 시 출토된 유물에서 이곳이 봉업사였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다수 발견되어 비로소 봉업사지로 알려지게 됐다.

  이곳의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는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를 지녔으며, 조성 시기는 5층 석탑과 더불어 고려 초기로 보인다. 그리고 ‘죽산리 5층 석탑(보물 제435호)’은 높이 7.8m의 우뚝한 위용을 자랑하며, 고려 초기 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경기도내의 탑들 중에 가장 조형미가 뛰어나다. 그리고 현재 칠장사에 보관되어 있는 잘 생긴 석불입상(보물 제983호)도 바로 이곳에 있었던 석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봉업사는 비봉산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 12년 2월에 어가가 청주를 떠나 이 절에 들려 진전을 참배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라고 하여, 봉업사가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이란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사찰로 조선시대의 원찰(願刹)과 비슷하다. 그런데 고려 태조의 진전사원은 전국의 이름난 사찰(개성의 봉은사, 논산 개태사 등)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봉업사가 결코 만만한 사찰이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사찰 중 이름 앞에 봉(奉)자가 붙은 사찰은 왕건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건립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고려의 흔적을 없애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 초에 폐사시킨 것으로 추측이 된다. 

 

  ‘죽산리 5층 석탑과 당간지주’를 살펴본 후 다시 38번 국도에 들어서서 일죽IC 쪽으로 1.0km 정도 동진하면 38번 국도와 17번 국도가 갈라지는 교차로에 이른다. 거기서 좌회전하여 17번 국도를 따라 2km 정도 북상하면 왼편에 유적들이 여럿 있는 죽산면 매산리에 이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누각 안에 모셔져 있는 ‘매산리 미륵(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이다. 비봉산을 등지고 서 있는 이 불상을 일명 ‘태평미륵(太平彌勒)’, 또는 ‘장군미륵’이라고도 하는데, 돌기둥 위에 짜 맞춘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대불이다.

 

  미륵의 생김새도 이 부근의 다른 미륵에 비해 잘 생겼고, 가로로 길쭉한 눈과 반달처럼 둥근 눈썹이 시원스럽다. 둥근 귀가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것은 소원을 빌러 온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미륵의 마음이 담긴 듯하며, 평범하고 친근감 있는 풍만한 얼굴이 이름 그대로 태평스런 느낌을 준다.

  듬직하고 우람하게 조성된 이 거구의 미륵상은 개태사 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등 고려 초기 석불들과 함께 당시의 대표적인 석조미륵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태평미륵은 고려 말의 몽고 난 때 죽주산성에서 적을 물리친 이 고장 출신의 송문주(宋文冑) 장군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그의 명복을 비는 한편, 이 일대가 늘 혹독한 전쟁터였던 곳이라서 전쟁이 없는 태평을 기원하는 뜻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있는 마당에는 5층 석탑이 놓여 있다. 석탑이 많이 상해 있긴 하지만 미륵불과 그 모습이 서로 잘 어울린다.

 

  태평미륵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진행하면 비봉산 죽주산성 아래에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97호)’이 있다.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와 세웠다고 하며, 봉업사의 유적으로는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여기도 여염집처럼 생긴 용화사라는 절이 있어서 석불입상을 지키고 있으며, 조계종 소속의 비구니스님이 주석하고 있다고 한다.

  매산리의 석불입상은 미륵불인데 반해 이곳 죽산리 석불입상은 여래입상이다. 상투 모양의 높은 육계를 쓴 높이 3.36m의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그시 내리 감은 눈, 풍만한 볼,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내민 모습이 모두 넉넉하지만 몸체에 비해 머리와 얼굴, 두 손을 크게 묘사했다. 

 

  그리고 여래입상이 있는 곳의 앞쪽 밭 가운데에 ‘죽산리 삼층석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 78호)’이 서 있다. 신라석탑의 분위기가 짙게 풍기지만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높이는 3.2m이다.

  이 석탑은 신라 말의 고승 혜소(慧炤) 국사가 조성했다고 하는 탑으로, 이 탑과 여래입상 모두 여기서 수백m 떨어진 ‘죽산리 5층석탑(보물 제435호)’이 있는 봉업사에 속했던 것이라고 하니 봉업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던지 짐작케 한다. 


  매산리 미륵당 앞에서 다시 17번 국도에 들어서서 500여m 북진하면 길 왼편에 죽주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갈라진다. 그리고 죽주산성까지 차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송문주 장군은 1225년 몽고 장군 살례탑(撒禮塔)이 쳐들어왔을 때  박서(朴犀) 장군의 휘하에서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는데 공헌했고, 1232년에 다시 살례탑이 쳐들어왔을 때는 승장 김윤후(金允候)를 도와 용인의 처인성에서 살례탑을 사살하는데 공헌한 바가 있었다.

 

  그러다가 1236년 9월 다시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죽주방호별감의 지위에 있어서 백성들과 함께 죽주산성으로 피난했고, 몽고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몽고군이 포를 쏘아 성문이 부서졌지만 성안에서도 포를 쏘며 맹렬히 대항하여 물리치고, 몽고군이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을 했을 때는 성문을 열고 일시에 기습하여 많은 몽고군을 죽였다.

  결국 몽고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15일만에 퇴각하였으며, 송문주 장군은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됐다.

  이 몽고군과의 전투 당시 송문주 장군 보여준 영특한 작전과 전승은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초인적인 인물로 숭앙하게 했고, 송장군의 지휘력은 신통하다고 하여 그를 ‘송귀신’ 혹은 ‘송신명(宋神命)’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이로 인해 송문주 장군은 이 지역 민간신앙에서 추앙되는 신(神)의 존재가 됐다.

 

  그리하여 죽주산성에 송 장군의 사당을 짓고, 전쟁이 있었던 9월을 기하여 중양절(重陽節)에 온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운산이라는 작은 산 하나를 산행했지만 이렇게 많은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아주 큰 산을 산행했을 때보다 더 큰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덕호)

*스크랲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출처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 원글보기
메모 : 창혁할배가 소개해 준 산행기가 알찬 분의 글